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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rabbit Oct 17. 2020

이유식의 세계

남편과 저녁을 먹을 때면 키키는 방금 분유를 먹어 배가 빵빵한데도 자꾸 식탁으로 손을 뻗었다. 갓 지은 쌀밥에 열기를 식혀 입에 넣어주니 맛있는지 입 안을 오물거렸다. 과일을 먹는데 침을 흘리는 아이를 보고 이유식을 할 때가 됐구나 싶었다. 아이가 이유식을 먹으면 물을 끓이고, 분유를 타고, 젖병을 씻어 소독하는 과정이 생략되겠구나 싶어서 편할 줄 알았는데 역시나 육아는 늘 예상을 빗나갔다. 


보통 아이가 5-6개월이 되면 이유식을 시작한다. 편해질 거라는 생각과 달리 돌이 지나기 전까지는 이유식으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기가 어려워서 분유와 이유식을 동시에 먹이기 때문에 엄마의 일이 두 배, 아니 세배로 늘어난다. 이유식기는 앞으로 맞이  할 유아식을 잘 먹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숟가락을 이용해 식사하는 방법을 배우고 다양한 식재료에 거부감 없이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었다.


이유식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인터넷과 각종 서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태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드넓은 이유식의 세계가 펼쳐졌다. 벽돌보다도 크고 무거운 이유식 조리법 책을 마주하자니 시작부터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준비물도 많았다. 냄비, 도마, 칼, 용기, 턱받이, 숟가락 등 ‘이유식 전용’이 붙은 수많은 종류의 도구 앞에서 어떤 것을 사야 할지 선택 장애가 왔다. 그냥 제일 많이 팔리는 것으로 주문했다. 시중에 이유식을 판다는 사실도 알았다. ‘시판 이유식’이라고 불리는데 하루 2개 혹은 3개의 이유식을 하루 단위부터 주별, 월별로 다양하게 주문해서 먹을 수 있었다.


늘 그렇듯 아이가 없었다면 결코 몰랐을 이유식의 세계에서 이것저것 준비물을 구매하고, 쌀미음부터 시작했다. 쌀가루를 물에 풀어 끓여서 이유식 용기에 담아 식히고 아기 입에 조금씩 떠먹였다. 모유와 분유 이외에 처음 먹어보는 새로운 음식이 신기한지 혀를 날름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받아먹었다. 두 숟갈 정도 먹었을까. 입을 꾹 다물고 쌀미음을 거부했다. 


3일 정도 쌀미음을 먹이고, 다음 3일은 찹쌀 미음을 먹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추가되는 재료와 손질이 늘었다. 마트에 가서 신선한 채소를 사서 다듬고, 조리하고, 한 끼 분량씩 소분해서 냉동실 가득 채워두었다. 소고기와 닭고기가 추가되면서 육수도 만들고 고기도 다지고 하다 보면 어느새 어른 음식보다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이 들어갔다. 내 끼니는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분유만 먹던 아이가 오물오물 입안을 움직이며 치즈도 먹고, 고구마도 먹보, 떡뻥도 먹는 것을 보면 이유식과 간식 만드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새로운 음식을 신기한 듯 탐험하는 모습을 보면 다시금 혼자 크는 아이는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아기가 깨어있는 시간은 놀아주느라, 아기가 낮잠을 자면 이유식을 만드느라 내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욕심이었다. 점점 조리 시간은 늘어나고,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시판 이유식을 사 먹이라고 은근히 바랐지만, 막상 주문하려니 비용도 비용이지만 모유를 오래 먹이지 못한데 대한 묘한 죄책감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어 이유식만큼은 내 손으로 직접 해서 주고 싶은 괜한 오기가 생겼다.


만드는데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 간만큼 아기가 잘 먹어주면 그것만큼 큰 기쁨은 없지만 늘 맛있게 먹어주는 것은 아니었다. 뭔가 내키지 않는지 어제는 잘 먹은 이유식을 갑자기 거부하기도 하고, 밥풀을 사방으로 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쾅쾅 때리고, 손으로 먹겠다고 한 줌 진 밥풀을 머리카락과 눈에 비벼서 아수라장을 만들기도 했다. 


밥 한 끼 먹이고 나면 정신이 혼미했다. 아기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아기 스스로 손으로 만지면서 먹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하는데, 사방으로 어질러진 밥풀을 보면 아기에게 자율을 주기는 쉽지 않았다. 숟가락을 아기 손에서 뺏어 내가 직접 떠서 먹이면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어 나 편하자고 자꾸 내가 먹이게 되었다. 


점점 이유식 책에서 알려주는 스케줄을 따르지 않고, 일주일 동안 같은 재료를 넣은 이유식을 먹이기도 했다. 재료가 많이 남아서이기도 했고, 스케줄대로 하려면 거의 매일 장을 봐서 재료를 새롭게 손질해야 했다. 어른도 그렇게 매일 다양한 반찬을 바꿔가며 먹지 않는데, 무리를 해가면서 해야 하나 회의가 들었다. 다행히 같은 재료로 만든 이유식도 아이가 잘 먹어줬다. 소고기만큼은 매일매일 끼니에 빠지지 않게 충분히 넣어 먹였다. 남편과 나는 수입산 냉동삼겹살을 구우면서, 아기에게는 매일 한우를 먹이고 있자니 참 내 새끼 잘 먹인다는 게 뭔가 싶기도 했지만, 맛있게 잘 먹는 아기를 보면 기쁘기 그지없었다.


어느새 자기가 포크로 고구마를 콕 찍어 입에 쏙 넣는 모습을 보니 젖병만 빨던 아기가 반년 사이 훌쩍 자란 것 같아서 신기하다. 언젠가 엄마 아빠와 함께 호프집에 가서 치킨을 뜯고, 맥주도 마실 키키와의 시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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