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담아내는 일은 사람의 전체를 담아내는 것이다
바이올렛 에버가든. 그녀는 군대에서 병기로 활약한 '군인'이었다. '명령'을 실행하는 존재. 그녀는 명령이 사라진 '현실'에서 비틀거렸다. 그녀를 마주한 사람들은 '감정'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당황은 불쾌함으로 번졌다. 이토록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니. 타자를 치기 위해 팔을 걷는 순간 사람들의 감정은 흔들린다. 전쟁으로 팔을 잃은 가엾은 아이.
바이올렛은 망설임 없이 적진으로 나아갔다. 필요한 것은 명령. 그녀는 그것을 수행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오랜 전쟁을 끝낼 '도구'로 여겼다. 그들에게 그녀의 가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바이올렛은 철저히 이용당했다.
전장 속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길베르트 소령뿐이었다. 그의 앞에서 그녀는 '도구'가 아닌 사람이었다. 감정이 억눌린 그녀조차도 그의 앞에서는 미세한 감정을 드러냈다. 두 사람의 유대 관계는 단순히 전우의 범위를 뛰어넘은 깊이였다. 길베르트는 그녀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은 존재, 그녀의 전부였다.
그런 세계에서 바이올렛은 '전쟁이 끝난' 현실로 건너왔다. 마지막 전투에서 잃은 두 팔은 의수로 변해 있었고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길베르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과 행방을 알 수 없는 길베르트의 행적. 그녀는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닿지 않는 보고서를 작성하며 길베르트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기다림 끝에 길베르트에게 부탁을 받았다며 호진스 중령이 찾아온다. 도구.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호진스 중령은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소령님은 괜찮으신가요?
소령님의 다음 명령은 언제 받을 수 있나요?
호진스 중령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훈련 속에서 무자비하게 사람을 살해하던 '도구'는 감정을 드러냈다. 사라진 길베르트를 향한 감정이 바이올렛을 지배하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병기'가 아닌 '인간'이었다.
바이올렛은 호진스에게 고객의 편지를 대필하는 자동 수기 인형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호진스는 바이올렛의 말에 이유를 되묻는다. 고객의 편지를 대필하는 일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 그저 고객의 말을 있는 그대로 타이핑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전하고 싶은 '감정'을 담아 그 내용을 편지에 적는 일이었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운 바이올렛에게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알고 싶습니다. '사랑해'가 무슨 뜻인지 알고 싶어요.
소령님은 마지막 명령과 함께 제게 그 말을 하셨어요.
소령님께 처음 듣는 말이었죠.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바이올렛은 길베르트에 '사랑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자동 수기 인형의 일을 선택한 것이다. 단순히 사랑의 사전적 의미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닌 그 속의 '감정'을 온전히 새기기 위한 결정이었다.
3화에서는 바이올렛이 본격적인 자동 수기 인형으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바이올렛은 자동 수기 인형 양성소에서 누구보다 우수한 성적을 얻는다. 문법도 타이핑 속도도 오타도 없는 학생. 그런 바이올렛에게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직접적인 '대필'을 할 때의 문제였다.
루클리아와 파트너가 된 바이올렛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편지를 대필한다. 양성소 교사인 로단세는 대필한 '편지'를 읽고는 바이올렛에게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교실의 학생들은 문장이 이어질수록 경악한다. 나열된 문장에는 루클리아가 털어놓은 '말'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말뿐이었다. 한마디에 숨겨진 의미를 바이올렛은 읽지 못했다. 결국 로단세는 바이올렛의 편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편지란 사람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인형은 사람의 진심을 파악해서 그것을 종이에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바이올렛은 점수가 높고 타자도 빠르고 정확하지만 루클리아 양을 대필한 이것은 편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루클리아는 졸업에 성공하지만 바이올렛은 실패한다. 그런 바이올렛이 마음에 걸렸던 루클리아는 그녀를 찾아온다. 바이올렛을 위해 길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필해주려 하지만 그녀는 한 문장도 꺼내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루클리아는 바이올렛이 자동 수기 인형이 되려는 이유를 전해 듣는다. 루클리아는 바이올렛에게 말한다.
마음을 전달하는 건 참 어려워
길베르트를 향한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는 바이올렛의 모습에서 루클리아는 자신이 전하지 못한 감정에 대해 깨닫는다. 루클리아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오빠에게 '살아남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지만 그것을 삼키며 견디고 있는 것이다. 부모의 죽음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오빠'의 모습이 괴로워서. 어떤 말로 자신의 온전한 감정을 담을 수 있을까. 오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다독일 수 있을까. 감정이 너무 커버린 탓에 루클리아는 스스로의 '편지'를 쓰지 못했다. 바이올렛처럼.
임무. 아니, 과제. 아니, 편지입니다. 루클리아가 보냈어요.
바이올렛은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루클리아를 위한 편지를 전하는 한마디에서 그녀의 변화가 드러나는 것이다.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벗어나 양성소에서의 과제가 아닌 루클리아의 진심이 담긴 '편지'. 화려한 수식어 없이 짧은 문장 만으로 바이올렛은 루클리아의 진심을 담아냈다.
오빠에게
난 오빠가 살아있어서 행복해. 고마워.
- 루쿨리아 말버러
편지란 무엇인가. 편지는 언제나 방향을 가지고 있다. 전하려는 상대를 향해 우리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다. 그 감정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몰라서 한 문장을 적는 시간이 늘어진다. 시간이 늘어지는 만큼 우리는 그 사람을 떠올린다. 어떻게 해야 편지를 받은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해받을까. 길이를 떠나 편지에는 어느 때보다 뚜렷한 기억이, 스쳐간 생각이 '나'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올렛 에버가든 속 자동 수기 인형이라는 직업은 독특하다. 누군가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일. 그것은 고객의 '감정'을 편지에 담아내는 작업이다. 그들은 고객이 털어놓은 '언어의 조각'을 정교하게 맞춘다. 작업 속에서 고객의 '감정'을 왜곡시키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언어'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편지 속에서 그들은 '고객이 되어 '감정의 순간'을 담아내는 것이다.
'사랑해'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내기에 너무나도 적합한 직업이 아닌가.
고객의 감정을 담아낼수록 바이올렛은 '감정'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정'이 스친다. 피로 얼룩진 그녀의 삶은 길베르트가 원했던 것처럼 빛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명령을 기다리던 삶에서 벗어나 자동 수기 인형이라는 새로운 삶을 '선택'한다. '도구'가 아닌 '인간'의 삶으로.
- 바이올렛 에버가든(2018), 교토 애니메이션, 넷플릭스, 원작 아카츠키 카나, 감독 이시다테 타이치
- 이미지 출처 : 바이올렛 에버가든 공식 홈페이지 키 비주얼, 스토리(회차 소개),
세계관 소개 http://violet-evergarden.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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