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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Sep 21. 2020

사이비를 마주할 당신에게

봉인했던 기억을 마주하며


많이 힘들었죠?


  마법 같은 한마디였다. 그 무렵 가장 필요했던 한 마디를 낯선 이에게 듣게 된 것이었다. 나의 이야기에 공감해주는 어른. 내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분명 ‘다이어트 상담’을 위해 만난 것이었는데. 따뜻한 마법에 휩싸여 나는 목적에서 벗어난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신기할 정도로 그녀는 대화를 이어갈수록 나와 닮은 구석이 많은 사람이었다. 관심사도 같았고 어떤 이야기든 대화가 끊기는 법이 없었다. 처음 만난 사이 같지 않은 익숙함이 곧 모든 경계를 무너트렸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당연하게 이어질 만큼. 그렇게 그녀와의 약속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를 소개해준 ‘친구’와 함께.   


  만남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다이어트의 이야기는 뒷전이 되어갔고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틈틈이 나에게 작은 부탁들을 쌓아갔다. 뜬금없이 나에게 심리 검사지(에니어그램)를 내민다거나 ‘책’을 준비하고 있다며 종교에 관한 내 생각을 묻곤 했다. ‘무교’인 나의 관점이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의심을 품지 못했다. 막연히 그녀가 나에게 베푸는 온정만큼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녀가 나를 ‘성경공부’로 이끌기 위한 단계였음을 깨닫지 못한 채로. 내 옆에는 그녀를 ‘인생의 멘토’로 바라보는 친구가 있었고 나 역시 친구 못지않게 그녀를 따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무교’인 나는 사이비 종교의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무지했으므로 나는 ‘그녀’의 성경 풀이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내가 아는 간단한 정보만으로는 성경에 관한 해석이 어떤 관점으로 오역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무비판적으로 그들의 해석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내 옆에는 ‘모태 신앙인’인 친구가 있었으니까. 친구가 반발하지 않는 것을 보며 그저 이것이 보통의 교회에서 배우는 ‘성경’이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구약을 지나 신약을 배울 때까지도 나는 ‘그녀’가 사이비 전도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몇 번의 정황들이 있었음에도 나는 사람에 취해 그 사실들을 삼켜버렸다. 심지어 그녀가 종교를 믿지 않는 나에게 ‘사탄’이 내 머리 위에 있다는 말을 건네도 나는 웃어넘겨버렸다. 그녀는 내 말을 들어주는 ‘어른’이었으니까.


  신약을 마칠 무렵 그녀는 새로운 부탁을 했다. 이후에 펼쳐질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센터의 6개월 과정을 수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과정만 수료한다면 지금과 비교도 못 할 만큼 새로운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고.


그녀의 눈에는 이례적인 광기가 서려 있었다.



  부담스러워하는 나에게 그녀는 오리엔테이션만이라도 들어볼 것을 권했다. 부담을 덜어주려는 배려라는 생각에 나는 의심 없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 나는 ‘모순’을 마주했다.


  그곳은 내가 생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분명 나처럼 과정을 수료하기 전 모인 사람들일 텐데 그들은 이미 그 ‘배움’에 심취한 사람들 같았다. 기도 속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고 강사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리엔테이션’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은 이미 ‘교리’를 꿰뚫은 사람 같았다.



  머릿속에는 의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애써 부정했던 진실이 나에게 ‘현실’을 비추고 있었다. 지인의 걱정으로 살펴본 기사에서 당부했던 방식들이 그대로 내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심리검사지(그림), 나를 주시하는 시선들, 6개월 과정에 당연히 함께할 것이라는 사람들. 너무나 똑같아서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났던 ‘그녀’ 역시 결국 ‘목적’이 있었던 것이구나. 대가 없는 친절이 아니었구나.


그렇게 나는 사이비에서 벗어났다.
타인을 향한 뿌리 깊은 불신을 남긴 채.     




  묻어둔 기억은 불현듯 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코로나 19로 펼쳐진 뉴스 속에서 피어났다. 그저 사이비를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나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를 속여왔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조직적’이었구나. 그날의 센터에서 정말 나는 ‘혼자’였구나.


나는 그들에게 전도를 가장한
‘기만’을 당하고 있었구나.  

  

 

  '사이비 종교의 전도 방식'에 따르면 나는 '센터' 단계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그들 스스로가 '사이비 교회'임을, 조직적으로 전도를 위해 속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전의 단계. 조사를 거듭하며 나는 그런 생각에 빠져들었다. 끝끝내 나는 그들에게 '전도'되지는 않았겠구나. 나는 결국 그 '종교'를 빠져나올 사람이었을 거야. 분명히.



  사람들의 관심은 식어갔지만 나는 계속해서 정보를 찾고 또 찾았다. 다시는 속지 않을 거라고. 더는 그렇게 '속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주변 친구들에게 사이비 종교를 조심하라는 말도 거듭했다. 그러다 한 친구에게서 중요한 진실 하나를 듣게 되었다.



사이비 종교 같다고 말했었는데
그때 너는 절대 '그분'이 그럴 리가 없다고 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나는 사람에 취해 '사이비 종교'에 빠졌겠구나. 결국 내가 사이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내 '의지' 때문 만은 아니었구나. 내가 기사를 보고 마음을 굳힐 수 있었던 건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주었던 '사람'들 덕분이었다.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는 말에 '사이비 종교'가 아닐까 걱정하며 성경공부 모임에 따라왔던 친구의 한 마디. 차 안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지인이 보내준 신문 기사 링크. 그것들이 쌓여 나는 '벗어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이 글이 ‘사이비’를 마주할 당신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그들은 당신이 가장 괴롭고 힘들 때 모습을 드러낸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함께 당신의 상처를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다. 그때 잡아야 할 손은 '그들'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손이다.


  마지막으로 소중한 사람들이 ‘사이비’를 겪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당신에게. 내 아픈 기억이 당신의 주변을 한 번이라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당신의 한마디가 소중한 사람을
사이비에서 벗어나게 할
진정한 '구원의 손길'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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