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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Oct 24. 2021

마침내 여왕의 명절이 사라졌다.

전으로부터 해방되다

  

  우리 집에는 고고한 여왕님이 있었다. 목소리 하나로 가족의 하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 할머니.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릴 때면 행복했던 하루도 순식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내가 죽어야지. 마법의 단어로 여왕은 가족을 주물렀다. TV에 건강식품이 나올 때면 꼬박꼬박 챙겨 먹는 사람이면서.


  그런 할머니가 일 년 중 가장 신경이 곤두서는 때가 바로 명절이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손님'이 오는 날이어서. 그녀는 손님의 몫까지 요리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전은 기본이었고 때로는 손님에 맞춰 새로운 반찬이 추가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아름 정이 담긴 손님을 위한 반찬. 하지만 그 정이 함께 사는 우리 가족에게는 좀처럼 닿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와 나에게.

  명절은 엄마와 나에게 답이 없는 시험 같았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익숙한 장면 하나가 우리에게는 시험의 연속이었다. 가족이 모여 전을 부칠 때도 만두를 빚을 때도. 나는 할머니의 '여자다움'을 통과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내게는 익숙한 한마디가 돌아왔으니까.


왜 너는 내가 아니라 엄마를 닮은 거니?


  날카로운 화살은 내 마음을 뚫고 기어코 엄마에게 날아갔다. 왜 나의 행동이 여자답지 못하다는 게 엄마를 향한 비난으로 이어져야 하는 걸까. 사춘기 무렵의 내가 가졌던 가장 큰 의문이었다. 엄마의 딸이라서 엄마를 닮는 게 왜? 엄마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웃어넘기는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 누구보다 마음의 그릇이 큰 존재. 엄마가 할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할 때마다 나는 마음에 더 큰 구멍이 자라났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사과를 하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나는 웅크린 아이가 되어갔다. 좀처럼 할머니의 여자다움에 나를 맞출 수가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가 앉아 있는 자세 하나가 여자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면 과연 누가 그 과정을 통과할 수 있을까. 정당하지 못한 이유에 여자라는 단어가 붙는 것만으로 지옥인데. 그게 명절과 만나면 폭발에 폭발을 일으켰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었다. 일이 없다면 만들어냈고 아프지 않아도 아프다고 말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여자다움에서 더 벗어날 지라도. 엄마는 그런 내 핑계가 사실인 것처럼 옆에서 거들어주었다. 상처 받는 딸을 위해서.


  때때로 나는 아빠를 원망했다. 고함지르는 할머니를 막지 못하는 아빠. 우리 가족 중 할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아빠는 나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내 눈에는 아빠의 어깨너머 할머니가 아른거려서 좀처럼 아빠와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아빠가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서 고군분투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사춘기가 되어서야 나는 마음속에 담아둔 폭탄을 터트렸다. 내가 할머니에게 받아온 차별에 대해. 마음속에 담아둔 만큼 악을 지르며 마음을 토해냈다. 더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고. 악을 쓰며 소리치는 나에게 처음으로 엄마와 아빠는 말을 더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변화의 시작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생긴 마음속 균열. 그 균열을 마주 보는 첫 번째 사건. 마냥 공부를 하고 잘 크는 줄만 알았던 첫째 딸이 털어놓은 진심. 엄마와 아빠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이 가족에게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변화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했다. 언제나 목소리 내지 않고 묵묵히 주변을 살피던 아빠는 할머니에게 생각을 전했다. 제사를 치르는 과정 하나하나에 숨겨진 남녀차별을 아빠는 찬찬히 바꿔나갔다. 할머니가 싫어하던 '남자'가 전을 부치는 일을 당연히 해나갔고 남자가 먼저 절을 해야 한다던 규칙도 바꿔버렸다. 할머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던 효자 아빠에게 변화가 생긴 것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규칙이 당연해질 무렵 두 번째 변화가 이어졌다. 아빠가 할머니에게 명절 제사를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명백히 여왕을 향한 아빠의 반기였다.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에 할머니는 엄마와 나를 노려보았다. 순간의 정적. 기다렸다는 듯 할머니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자신의 목소리가 곧 무기인 사람. 우리 집 여왕님은 자신의 고함이 또다시 아빠를, 아니 우리 식구들을 모두 지배할 것이라 여겼다. 당신의 소중한 둘째 아드님은 누구보다도 당신을 떠받들던 효자였으니까. 그러나 효자였던 아빠는 더는 그녀를 최우선으로 두지 않았다. 


고함에 고개를 떨구지 않는,
여왕님의 아드님이 아닌 엄마의 남편,
그리고 나의 ‘아빠’가 된 것이다.


  명절이 다가올수록 아빠의 선언은 현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빠는 할머니가 우리 가족을 투명인간 취급해도, 다른 친척들을 동원해서 화를 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확고하게 자신의 의지를 그들에게 전할 뿐이었다. 엄마와 내 탓이라고 여겼던 할머니도 차츰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알던 효자 아들이 이제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덕분에 엄마는 처음으로 명절 반찬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났다. 찾아올 사람이 없어서 할머니의 '손님'에게 맞출 필요도 없었다. 

 

  다가온 명절. 악몽을 꾸지 않은 아침이 낯설었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는데도 소리를 지르는 사람 하나 없었다. 열 한시. 평소라면 대야 한 가득 동그랑땡을 만들고 세 판을 가득 채울 전을 부칠 시간. 기름 냄새가 그득할 곳에는 우리 가족을 위한 재료가 놓여 있었다. 대기업의 동그랑 땡 한팩과 그릇의 반도 채우지 못한 동태포. 우리는 그렇게 함께 모여 전을 부쳤다. 가족이 먹을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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