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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Oct 23. 2021

하루가 지나고 회사를 버렸다

강릉에서



나는 유난히 이 좋았다. 숲에서 눈을 감으면 온갖 소리들이 나를 감싸안는 기분이 들었다. 나뭇잎이 바스락. 낯선 새의 날갯짓이 푸드덕. 생각의 꼬리는 소리와 함께 술래잡기를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머리를 짓누르던 고민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숲에 있는 것만으로 한 발자국 떨어져 내 고민을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


  덕분에 여행을 갈 때면 일정에 숲을 끼워 넣는 버릇이 생겼다. 심지어 바다가 유명한 여행지에 갈 때 조차도. 강릉. 모두가 바다를 보기 위해 향하는 곳에서 나는 버릇처럼 숲을 찾기 시작했다. 자주 그래 왔으니까.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는 의문을 가졌다.


다들 바다 보러 가는 곳인데 굳이 숲에 가려고?


  친구의 질문에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버릇 때문에 일정에 넣은 걸까. 의문을 감춘 채 나는 친구에게 웃으며 답했다. 그냥 숲이 좋아서.


  그 무렵 나는 분노로 모든 감정이 삼켜진 상태였다. 내가 사랑했던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들이닥쳤다. 인력의 구멍은 좀처럼 충원되지 않았고 함께하던 동료들도 과로에 쓰러지는 일이 잦아졌다. 사라진 인원만큼 최선을 다하고 또 최선을 다해도 인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인내심과 사명감으로 버티던 어느 날 나 역시 몸이 망가지고 말았다. 


  몸까지 망가지고 나니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이 눈앞에 그려졌다. 기다림이 변화를 만들 수 없다는 것. 회사에서 조용히 상황이 나아지기만 기다리던 나는 결국 총대를 메고 일을 벌였다. 지켜보는 일이 익숙했던 내가 행동을 결심한 것이었다. 누구도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나는 해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관리자에게 직접적인 상황을 전달했다. 모른다면 알아주기 원했고 알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을 제시해주기를 원했다. 이해해달라는 말로 버티기에는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렇게 힘이 든다면 그만두어도 좋다는 답변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참아냈던 시간들이 빠르게 스쳤다. 말문이 막혀서 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면담을 마치고 나는 여러 생각에 잠겼다. 다른 방법을 찾지 않으면 조금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나는 동료가 모두 모여 의견을 나누다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직접적인 면담이 통하지 않는다면 관리자의 상사에게 면담을 요청해보자.


  결정을 하고 나니 이상하리만큼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관리자의 상사와 일정을 잡고 면담을 준비하기까지. 멈춰 설 만한 순간에도 나는 앞만 보고 달렸다. 내가 사랑했던 일이 날 망가뜨리는 현실이 비참하고 화가 나서.


  면담을 준비하며 나는 동료들의 구체적인 의견을 모으고 가려냈다. 머리로 담아내기엔 넘치는 이야기들이어서 나는 일단 하나의 입장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보고하듯 모두에게 동의를 구하며 완성해나간 글. 한 번도 써보지 않은 글쓰기여서 힘이 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거대한 바람이 내 등을 떠받치고 밀어냈다. 그렇게 기나긴 준비가 끝나고 예정된 면담 날짜가 다가왔다.


  부풀었던 희망과는 달리 현실은 기대 이상으로 냉랭했다. 길게 늘어졌던 면담의 시간 동안 우리의 표정은 더 깊은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답변의 중심은 하나로 이어졌다. 회사의 입장도 생각해달라. 관리자와 보다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달라. 허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바로 잡으며 나는 애써 일에 몰두했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관리자의 요구에도 있는 힘껏 참아냈다. 실패한 면담, 그다지 변화가 없는 업무 환경. 속마음을 꺼내서 보여주어도 돌아올 대답이 너무 빤해서 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지쳐 잠이 들 때면 그런 생각이 자주 스쳤다. 나는 왜 일하고 있는 걸까.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이 뭐였을까.


  답답한 마음에 친구들에게 면담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다. 8장이 넘어갔던 입장문. 2장의 질문지. 친구들은 왜 그런 곳에서 재능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곧 그만둘 것이라고 답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더 많은 퇴직금을 얻을 수 있으니까. 딱 그만큼의 퇴직금을 얻고 이 더러운 직장을 떠나리라. 그렇게 열변을 토해내고 나면 친구들은 다시 입을 모아 되물었다.


그전에 그만두면 안 되는 거야? 네가 걱정돼.


  과부하가 걸려버린 나는 조금 더 버티기 위해 강릉 여행을 택했다. 더 멀리 가기에는 당장 돌아와서 일할 상황이 걱정되어서 비교적 가까운 강릉을 택한 것이었다. 여행을 떠나서 몸도 마음도 쉬고 나면 다시 5개월을 버틸 힘이 생기겠지. 막연한 결심을 하며 나는 여행길에 올랐다.


  고민이 그득할 때 떠나는 여행. 머리가 복잡하고 버거워질 때 나는 비워내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그럴 때마다 온몸에서 없던 힘도 솟아올라 나는 멈추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발이 닿는 데로. 하지만 강릉에서의 나는 이전과는 다른 상태였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온몸이 무거웠다. 숨이 차고 좀처럼 여행에 집중하지 못했다. 친구와 만나기 전까지 혼자 가고 싶은 곳을 돌아다닐 생각이었는데. 체력이 따라주지 못해서 나는 가다가 멈춰 서고 또 멈춰 섰다. 덕분에 내 메모지에는 빗금이 넘쳐났다. 못 갈 것 같아.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결국 숲까지 일정에서 지워버렸다.


  친구와 약속했던 장소를 향해 나는 무기력하게 걷기 시작했다. 온몸에 힘이 쫙 빠져나간 기분. 여행에 들뜬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할 수 없어서 나는 애써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을 바라보며 느릿. 어느새 비워지지 않는 걱정이 몸과 마음을 물들였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에 멈춰 섰다. 바스락. 내 앞에는 계획에 없던 낯선 길이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고 길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셔터 소리에 나는 생각을 멈췄다. 오랜만에 느끼는 낯선 풍경이 주는 감각. 스마트폰을 바라보니 이미 나는 목적지를 벗어나 걷고 있었다.


아, 또 길을 잃었구나.


  길을 잃어버리면 잃어버리는 대로 새로운 길을 찾아서 걷는 것. 나는 그런 감각이 좋아서 여행을 떠나는 거였는데. 돌이켜보니 강릉에서 나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 바빴다. 동료들과 함께 있는 단톡방을 살피며 내가 없는 사이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까 전전긍긍했다. 잠시 잊고 회복하려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나는 계속해서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담아내며. 새로운 길이 주는 소리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바라보는 나. 길을 다시 바로 잡을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나는 늘 그렇듯 출근을 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여행을 잘 다녀왔다는 빈말이 흩뿌려지고 익숙한 한숨이 공간을 채워갔다. 그러다 내 눈치를 살피는 몇몇 동료들과 눈이 마주쳤다. 고민이 가득해 보이지만 어쩐지 홀가분한 표정. 여행을 다녀온 나와 닮은 표정. 머뭇거리던 한 사람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관리자에게 그만두겠다는 말을 전했다는 것.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어서 홀가분하게 나는 바로 잡아야 할 길로 나아갔다.


어, 나도 그만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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