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주 주먹을 움켜쥐었다. 화가 날 때도 속상할 때도. 주먹에 힘을 주다 보면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감출 수 있었다. 소매 속에 감춘 주먹을 들춰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는 일렁이는 마음을 주먹에 잡아두고는 웃었다. 그저 웃었다. 움켜쥔 감정들이 터져 나오는 순간 아무렇지 않음을 연기하는 아이가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태연하게 나는 솔직하고 명랑한 사람이 되어갔다. 그것이 연기하는 아이가 찾은 가장 적합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억눌러왔던 감정에 맞춰 반 박자 빠르게 웃고 울 수 있는 사람. 최선을 다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순간 필요한 대답을 꺼내 줄 수 있는 존재. 그렇게 연기를 하는 동안 아이의 곁에는 사람들이 그득했다. ‘나’를 갈구하는 사람들. 마음속 아이는 그 관계가 자신을 특별한 어른으로 성장시킬 것으로 생각했다.
어른. 아이에게는 까마득한 단어였다. 아이는 높게 치솟은 탑 아래에서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언젠가 나도 어른이 될 거야. 그때는 전혀 다른 어른이 되어야지. 탑에서 툭 떨어진 단어들은 아이의 숨을 짓누르곤 했다. 이해해야 해. 내가 맞아.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야. 아이는 그 단어들에 짓눌려 자신을 탓하기 바빴다. 마음속 응어리를 드러내는 일도 그것에 대항하는 일도 모두 지쳐버렸기에 아이는 화살표를 자신에게 돌리며 버텼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성인이 된 나는 여전히 아이여서 그때의 모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자신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늘 특별해 보였다.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줄 것 같아서.
특별해지기 위해 나는 그들에게 자신을 맞추는 일이 익숙해졌다. 그것은 내가 부정하던 어른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시간을 내어 들어주고 그들이 원하는 답을 온 힘을 다해 내뱉고. 나는 너를 이해해. 네가 맞아. 모든 건 바뀔 수 있을 거야. 그러다 보니 숨을 쉬듯 내 삶 속의 시간이 삭제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손톱을 깎을 때뿐이었다. 주먹을 꽉 쥐다 보면 손톱으로 인해 자국이 남으니까. 자국을 보다 보면 삭제된 시간이 느껴졌다. 이만큼 손톱이 자라는 동안 나는 타인에게 내 시간을 부어버렸구나. 그러나 생각은 길어지지 못하고 손톱처럼 빠르게 깎여 나갔다. 손톱에 빨간 살갗이 드러날 정도로 바짝. 또 자라날 손톱을 최대한 늦게 보기 위해서.
외면하던 시간은 켜켜이 쌓여 나에게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데려와 주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이용하던 사람들. 틈의 진실을 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더욱 명랑한 가면을 썼다. 괜찮다는 말은 내가 어른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나는 그 말을 누구보다 자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를 사랑하던 사람들의 걱정이 내게는 닿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들’을 위한 탑에 나를 묶어버렸으니까.
언니는 왜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는 거야?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하는데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니. 부정하고 싶은데 입가에서는 어떤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질문의 송곳이 날카롭게 명랑히 웃던 내 가면을 부숴버렸다. 참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나를 바라보며 그 친구는 한 마디를 보탰다.
울고 싶으면 울어. 왜 울지 않으려는 거야.
그때 나를 감싸던 특별한 어른의 마법은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자라나지 않은 아이는, 원망하던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아이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 마음을 간파당한 나는 가차 없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마음속 감정을 표현하는 일. 나는 중요한 선택지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 안에 하나의 벽을 깨는 일이 어렵다고 주저앉아버린 사람이었다. 금이 간 벽이 조금만 손을 뻗으면 깨질 것 같았는데. 좀처럼 나는 움켜쥔 주먹으로 벽을 내리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을 채찍질하는 일을 반복할 뿐이었다. 몸만 자라난 채 마음속 아이는 또 익숙하게 자신을 내리찍고 있었다. 이제는 감싸주어야 했는데.
내가 감정을 드러냈을 때 ‘그들’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누군가가 나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을까. 내가 누군가에게 무수히 상처를 받은 것처럼 내 감정이, 어느 단어가 ‘그들’을 망가뜨릴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나의 가정 속 꼭대기에는 언제나 다른 이들이 자리 잡았다. 어느 날은 부모님, 친구, 그리고 아득한 꼭대기에는 할머니. 나는 가정이 쌓은 탑의 꼭대기를 바라보며 그 끝을 상상했다. 내가 나를 드러내는 순간 탑이 무너져서 나를 덮쳐 버릴 거야.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가 끝나 버릴 거야. 나를 향한 가정은 언제나 가혹했다.
한 번도 탑이 무너진 적은 없었는데.
나는 아득한 탑 꼭대기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나는 탑을 무너뜨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삭제된 만큼 나는 특별한 어른을 연기한 것뿐이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앉아서 들어주는 착한 사람. 입꼬리에 힘을 주며 나는 타인의 이야기에 집중하려 노력할 뿐이었다. 노력하다 보면 내 마음속에는 돌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쿵. 쿵. 돌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하나둘 개수를 늘려갔다. 나는 그 돌을 마음속에 담아냈다. 돌이 무거워질수록 나는 심연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심연을 마주하지 못했다. 타인의 심연 앞에서 나의 심연은 얕아 보였으니까.
내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들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나는 타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하루가 지나갔음을 깨달았다. 눈을 뜨고 다시 감았던 것 같은데 내 시간은 누구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내 마음속 심연도 조금씩 깊이를 더해갔다. 지나치고 또 지나치다 보니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그때마다 나는 혼자 슬픔을 감당하는 방법을 찾았다.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책을 읽어보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소리 내지 않은 채 펑펑 울었다. 눈이 퉁퉁 부어도 상관없었다. 이유 없이 그렇게 자주 울었다. 울 때마다 나는 비어있는 노트를 찾았다. 정해놓지 않았지만, 손에 잡히는 어느 노트마다 그날의 내가 담겨 있었다. 날 것의 감정이 종이 가득 채워졌다.
초등학생의 나. 사춘기를 겪던 시절의 나. 그리고 20대의 나.
나는 나누는 법을 몰랐다. 슬픔도 기쁨도 어느 것 하나 타인과 나누지 않았다. 탑이 아득했으니까. 나는 타인과 감정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일방적이었다. 깊숙한 내면의 나를 감춘 채 나는 ‘그들’에게 나를 이용하기 쉽도록 내버렸다.
밑 빠진 독에 물이 다 없어져 버렸는데 네가 계속 퍼주고 있더라.
벽은 친구의 한마디에 턱없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그제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이야기가 내게 닿기를 바라며 곁을 지키던 사람들. 나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감춰진 마음을 비판하던 친구들.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을 보고 나서야 나는 솔직해질 용기를 얻게 되었다.
솔직해지는 것으로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이용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모습을 벗어나 나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나를 ‘갈구’하던 사람들은, 나를 특별하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쉽게 진실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내가 변했기 때문에 떠났고. 누군가는 쉽게 나를 다른 사람으로 대체했다. 그들에게 특별한 사람은 언제든 이용이 가능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득했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내 곁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았다. 삭제되던 시간은 쌓여갔고 나는 그제야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아주 단순한 단계부터 차근차근. 그래야만 내가 나를 ‘타인’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모두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변화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되었다. 주먹을 쥐기 전에 나의 감정을 드러내니 빨갛게 살갗이 드러날 정도로 손톱을 바짝 깎지 않게 되었다.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들이 쏟아지고 나니 나를 누르던 돌들도 차츰 쓸려나갔다. 그제야 나는 마음속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진심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