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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Oct 18. 2021

내가 나에게 전한 편지


받고 싶은 선물 있어?

친구의 질문에 나는 시간을 끌기 바빴다. 친구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물이면서도 내가 말할 법한 선물. 거듭된 고민 끝에 내가 내린 쉬운 답은 공책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너라면 그럴 줄 알았어. 그런 답이 돌아올 때면 나에게는 새로운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나 다운 게 뭘까?


  생일이 다가올 때면 여러 종류의 공책들이 책장을 채워갔다. 아무리 써도 좀처럼 줄지 않는 공책. 내 답이 공책에서 네가 선물하고 싶은 물건이면 좋다는 새로운 답을 찾을 때까지 책장의 한 칸은 언제나 공책의 자리였다.


  책장을 정리할 때가 되어서야 나는 공책들과 마주했다. 초등학, 중학교, 학년을 거친 공책들에는 이제는 잊어버린 메모들이 가득했다. 수학 공식, 친구들과 했던 낙서, 지금은 읽을 수 없는 영어 문장까지.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책을 들춰보다가 나는 낯선 메모를 발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익숙한 글씨로 빼곡히 채워 넣은 편지. 내가 쓴 편지였다.



  편지가 적힌 시기는 일정하지 않았다. 기억하는 편지보다 새까맣게 잊어버린 편지가 더 많았다. 아무 노트의 가장 마지막 장에 흩뿌려진 편지. 감추고 싶었던 지난날의 내가 그 속에 잠겨 있었다. 전하지 못한 편지를 바라보며 나는 지난날의 나를 마주했다.


  편지의 수신인은 제각각이었다. 이제는 이름도 잊어버린 친구였다가 엄마였다가 동생에게 화난 날에는 동생이었다가. 그러다 사춘기가 될 무렵에서야 편지의 수신인이 일정해졌다. 사촌 언니. 어린 시절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한 사람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과 정 반대의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 어린 시절 내게는 언니가 어른보다 더 어른 같았다. 내가 바라보는 언니의 세상은 자유가 가득했다. 좋아하는 걸 말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었으니까. 언니와 대화하고 있을 때면 나는 세상 밖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사춘기를 벗어나기 전까지 나는 사촌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멈추지 못했다. 언니의 세상은 자유로우니까. 언니의 말은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내 고민은 아무렇지 않게 털어줄 것 같았다. 결국 언니도 나보다 고작 3살 많은 아이였을 뿐인데.


  시간이 흘러 명절에 언니를 보는 일이 줄어들고 포장지에 감춰 있던 언니의 진짜 세상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언니에게 편지를 쓰는 일을 멈췄다. 한 번도 보내지 못한 편지. 수신인을 잃어버린 편지는 한동안 모습을 감춘 것 같았지만 이내 새로운 수신인을 찾아 모습을 드러냈다.


  나 자신. 끝은 내가 스스로에게 쓰는 편지였다. 전해줄 필요가 없는 편지. 나는 어느 날의 우울이 찾아올 때마다 모순된 감정을 푸는 방법으로 편지를 택한 것이었다. 언젠가 내 고민을 쉽게 해결해줄 특별한 어른이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서.


  받고 싶은 선물조차 솔직히 말할 수 없던 아이. 눈치보기 바빴던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는 글이라도 쓰는 이었다. 아무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말들을 글 안에 꼭꼭 담아서 그날의 흘러넘친 감정을 눌러냈다. 감정을 쓰는 법을 몰라서 아이는 시한폭탄처럼 부푼 감정을 끌어안고서 몸만 자라났다.

  

  다 쓴 공책을 비워내며 나는 나에게 쓴 편지를 받았다. 새로운 책이 채워질 책장 구석에 여전히 자리를 지킬 나의 감정, 나의 나날. 이제는 끌어안을 수 있어서 나는 그 자리를 남겨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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