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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Feb 22. 2020

트빌리시의 아파트

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6.


내가 묵었던 아파트는 리버티 광장 근처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다. 광장에서 왼편으로 꺾어 딱 열 발짝만 나아가면 차도 사람도 소리도 사라진다. 곧게 뻗은 차도를 가운데에 두고 양 옆으로 주차된 차들, 바람이 불 때마다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내며 조각난 햇빛을 쏟아내는 크고 푸른 가로수들, 그리고 오래된 건물들이 한 줄씩 서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샌드위치 같겠네.


პური는 '푸리(빵)'


회색 건물의 커다란 대문 옆에는 허리께의 높이에 작은 반지하 창이 나있다. 붉은 글씨의 간판이 상당히 수상쩍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가끔 지나가던 사람들이 허리를 숙여 창문으로 1라리짜리 지폐를 은밀하게 밀어 넣는 것은 정말 의심스러운 광경이지만 잠시 후 그들은 길이가 1미터쯤 되어 보이는 길쭉한 빵을 종이에 싸서 돌아간다. 그렇다. 이곳은 빵집이다.

조지아의 빵인 '푸리'는 커다란 항아리형 화덕에 구워 만든다. 재료도 그렇고, 쫄깃하고 담백한 맛도 인도의 난과 비슷하다. 화덕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푸리 냄새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빵집 위에 산다는 것은 꽤 좋은 일이다.


아파트의 두꺼운 나무문은 꾹 닫혀 있고 앞에는 숫자 키패드가 붙어있지만, 그 무뚝뚝한 겉모습이 무색하게도 대부분의 경우 손바닥으로 지그시 힘을 주어 열면 그냥 열린다. (트빌리시 구시가지에는 닫혀있을지언정 잠긴 문은 거의 없다.)


아파트 문을 열면 바로 앞에 낡은 계단이 있다. 처음엔 어두운 습기와 정적이 처음엔 조금 무섭게 느껴졌지만 며칠 새에 그늘에서 자라는 버섯처럼 어둠에 익숙해져 편안한 기분이 든다. 

나는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 2층 복도로 들어섰다. 안쪽으로 뻗은 이 복도는 항상 발걸음보다 조금 늦게 불이 켜지곤 했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된 나무 바닥을 먼저 보면 발을 내딛기가 겁날 정도니 차라리 어둠 속에서 낙천적인 용기로 걸어가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복도의 오른편에는 창이 활짝 열려 있어 조그만 안뜰과 인접한 이웃집의 테라스가 내다보인다. '쥐 죽은 듯 조용하다'라는 비유를 빌리자면 이 아파트는 쥐떼의 몰살 현장이다. 

나는 아침마다 이 삐걱대는 복도를 지나면서 이 건물에 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해 보기도 했지만 오후나 저녁 무렵에 돌아오면 이웃집 창밖에 내걸린 빨래가 달라져 있거나 테라스에서 달큼한 와인 냄새가 풍겨오곤 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조우는, 내가 보는 앞에서 늘 닫혀있던 커튼의 틈 사이로 손 하나가 불쑥 나왔다가 들어간 일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상쾌한 바람과 함께 어디선가 솜씨 좋은 피아노와 노랫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짙은색의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팔을 지니고 있을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 

이 아파트에 머무는 동안 몇 번의 오후에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한 번 시작하면 한 시간은 거뜬히 이어졌으니, 아마도 프로다. 해가 진후 구시가지의 멋진 바들을 기웃거리다 보면 우연히 만날지도 모르겠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내 귓가를 부드럽게 훑는 이 노랫자락의 주인은 나와 어떤 관계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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