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고유한 소리를 머금고 있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머금은 소리를 쫓거나 혹은 거스르며 산다. 상호성의 원칙,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 것은 자연의 기본 순리이다. 사람은 소리를 내고 듣고 반응하며 삶을 채워간다. 채움이 끝까지 넘치면 이내 비워내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글쓰기가 힘든 때는 몸을 움직인다. 어떤 이야기가 지금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지 어떤 삶이 오늘도 펼쳐지고 있는지 주변을 돌아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단서가 포착된다. 한 줄이라도 쓸 수 있는 힘을 얻고 이내 한 줄을 쓰면 한 장이 된다.
'오늘은 이런 글쓰기를 해야지! 여기까지 완성해야지!' 그런 건방진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는다. 글이 써지면 자연스럽게 쓰고 멈추면 몸을 움직이고 힌트를 얻으면 다시 글을 쓴다. 소음이 넘치는 시대에도 분명히 의미 있는 소리가 있고 그것이 나에게 힌트를 준다.
나는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가?
분주하고 바쁜 시간을 지나니 '소음 하나를 더하며 바쁘게만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이 엄습해온다. 소음에 잠식되어 참된 소리인지 거짓된 소리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늪에 빠져버린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면 어떤 소리도 반응하지 못하도록 딱딱한 마음으로 굳어진 것은 아닌지?
어떤 소리를 듣고 쫓을지는 내 안에 있는 나의 소리가 결정한다. 나에게 말을 걸고 질문하고 표현하는 존재. 거추장스럽고 내 욕구와 정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존재. 나를 잘 알면서도 또 나를 잘 모르는 존재. 나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다그치는 존재. 그 존재를 가벼이 여기면 깊은 고통을 겪는다. 나 스스로 나의 안녕을 살피지 않은 것이기에.
외부에 신경을 곤두세우면 머지않아 피곤을 느낀다. 고된 일을 끝내고 느끼는 유쾌한 피곤이 아니다. 무거운 몸, 피폐한 마음, 공허한 영혼과 마주한다. 그리고 이내 무기력해진다. 겹겹이 쌓인 이와 같은 피곤함이 해소되는 방법은 내 안의 소리에 반응하며 그 소리가 온전히 나를 이끌도록 시간을 축적하는 것이다.
삶에서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것을 원하고 언제나 결핍에 집중하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을 누릴 겨를도 없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후회가 남는다. 그런 시간이 다가오면 언제나 스스로 과감하게 '스톱' 버튼을 눌러야 한다.
잠시 멈추고 나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심심한 일상을 되찾는다. 게으름, 심심함.. 이런 단어를 내 곁에 두고 다시 내 목소리를 쫓아 내가 머금고 있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오기 위래 노력하고 내가 더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거나 더 지나치게 욕망을 따르지 않도록 경계한다.
지난 2주간 매일 1~2시간씩 잠자며 오랜만에 몸이 짜릿할 때까지 일을 했다. 왜 이 일을 해야 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어느 회사에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다만, 어떻게든 끝을 보려는 이상한 오기가 발동했고 일하며 쪽팔림을 느끼고 싶지 않으려는 이상한 욕망이 나를 덮었다. 그렇게 2주간의 시간을 보낸 주말, 오로지 하나의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글을 쓰고 싶다."
매일 조금씩 쓰면서 1주에 1~2번씩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며 나는 나름대로 기쁨을 느꼈다. 동시에 읽고 쓰며 보내는 시간에 온전함을 느꼈다. 잠시도 쉴 겨를 없이 바빴던 시간을 뒤로하고 조용하고 잠시라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되찾으니 제법 반가웠다.
내 안에 있는 소리를 듣고자 잠시 눈을 감고 온 몸에 힘을 빼보기도 한다. 누워서 꼼짝하지 않고 TV를 본다. 씻기도 귀찮아 계속 누워서 뒹굴뒹굴 굴러다닌다. 집 밖으로 외출도 하지 않고 그저 누워있다. 생산성과 효율에 집중하던 시간을 털어내기 위한 일종의 발버둥이다.
'모든 시간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참을 누워있다 보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간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허무함을 느끼고 싶지 않은 인간이 자신의 시간에 대해서 고유한 의미를 부여할 뿐. 아마 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고 애썼던 시간은 어서 뒤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균형이 깨지니 그것을 복원하기 위해 조용히 읽고 사부작사부작 글을 쓴다. 그것으로 족하다. 지난 금요일 재미있게 시청했던 tvN 프로그램 삼시세끼에서 배우 차승원은 스치듯 지나가며 한마디 던졌다.
'이번 생은 이렇게 살 거야. 충분히 괜찮은 생이야..'
맞는 말이다. 충분히 괜찮다. 괜찮은 생이다. 해가 지는 즈음에 글을 쓰고 짧은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그러니 나를 더 채찍질하지 않아도 되고 닦달하지 않아도 된다. 충분히 괜찮은 생이기 때문에.
서산으로 기우는 햇살은 여전히 따스하고 붉은빛은 어둠과 만나기 전까지 영롱한 일요일 초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