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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탄 리 May 30. 2024

미흡한 관계

소품집

사람들은 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한다. 관계에 대한 책들은 서점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만큼 이 사회에서 관계가 중요해졌기 때문일까? 사람들이 관계를 위해 안달복달할 만큼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생물이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그런 서적들이 많이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우리 부모님 대 사람들이 살던 시대에는 그랬다. 우리 부모님은 가끔 말씀하시곤 한다. ‘내가 어릴 때에는 동네 으슥한 평상 위에서 자도 아무도 해코지 안 했는데….’ 이전 시대는 그만큼 사람 간에 정이 많았다. 하지만 동시대의 누군가가 평상 위에서 잠이 든다면, 장기 적출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내가 80년대와 90년대를 살아본 것은 아니기에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00년대 인터넷 세대와 2010년대 스마트폰 세대를 살아봤기에, 우리 시대의 관계의 문제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타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기도 하다.

 나 P는 섬에 살고 있다. 내 친구 A도 살고 있다. 내 친구 B도 섬에 살고 있다. 내 친구 C도, 내 친구의 친구도,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도. 모두가 자신만의 섬에 살고 있다. 우리가 서로의 섬에 넘어가기 위해선 바다를 건너야 한다. 바다는 여름에 덮는 얇은 이불처럼 가볍고 기다랗다. 기다랗다고 해서 수평선 너머까지 아득한 섬나라까지 이어지는 길이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근방의 섬에 살고 있다. 우리는 바다의 양 모서리를 잡고 이불을 살짝 흔들 듯이 바다를 흔든다. 바다는 결코 팽팽하지 않다. 적당한 수축력을 가진 파도 같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카카오톡을 보낸다. 하지만 카카오톡만 보낼 뿐 결코 상대편 섬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그 섬의 총면적이 얼마인지, 몇 만 그루의 나무가 사는지, 어떤 꽃들이 피는지, 어떤 곤충들과 새들이 어떻게 노래하고 있는지, 나무에선 어떤 과일들이 열리는지, 더울 땐 어느 정도로 더운 지 같은 요소들을. 단지 피상적인 정보를 알고 있을 뿐이다. 내 섬만 해도, 다양한 수억 종의 생물들이 살고 있는데, 그걸 아는 사람은 이 세상을 뒤져봐도 없을 것이다. 나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내게 전화를 하거나 나와 만나자고 연락을 해온다. 그리고 만나면 가벼운 한담과 내 이야기보다는 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시간이 이어진다. 내가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타입이기 때문에 그럴까. 아무튼, 내 섬에는 많은 재미난 것들이 있고, 나는 그 섬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장 재미난 것은 스마트폰과 책인데, 나의 경우에는 그렇다. 다른 이들의 경우도 비슷할 것이다. 이 스마트폰이 생기고 난 다음에는 누구도 자기 섬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자연스레 소원해졌다. 그러다 보니, 바다의 양 모서리를 잡고 살살 흔드는 것 같은 관계 밖에는 형성이 되지 않는 것이다.

 내 지인 중에는 a군이 있다. 나는 연상의 a군과 그렇게 친밀하지 않다. 하지만 a군은 나와 친밀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아는 반면,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를 잘 알지 못한다. 물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a군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a군이, 내가 용납하지 못하는 부분을 내게 드러냈거나, 내가 정해 놓은 선을 넘어온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a군은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고 내게 계속 다가온다. 그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밖에 없다. 과감하게 관계를 정리하거나, 적당히 그 관계를 이어주는 말을 하거나. 아니면, 내가 내 선을 없애버리고 상대방에게 나 자신을 아예 허용해 버리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세 가지 방법 중 어느 것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다. 어떤 방법을 쓰던 나는 늘 후회하곤 했다.

 또 내 지인 중에는 b양이 있다. 나는 연상의 b양에게 인간적인 애정과 호감이 있었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의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모르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선을 넘었거나, 혹은, 내가 선을 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실은 선을 넘은 일일 수도 있는 노릇이다. 어쩌면 아예 나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b양은 내 이야기를 안다. 하지만 나는 b양의 이야기를 그리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내 이야기를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님에도, 내게 먼저 마음을 열어준 b양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 반면, b양은 자신 내게 열고 싶지 않았던지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하지 않았다. 나는 b양에게 조금씩 계속 다가갔으나, b양은 내 접근을 부드럽게 막았다. 나는 결국 b양의 마음에 다다를 수 없었다.

 이런 예시를 계속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위에서 한 비유와 아래의 예시들이 어떤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말할 수 있다. 각자의 섬에 살면서 바다의 모서리를 잡고 얇은 이불을 흔드는 젊음들에 대해서 서술했다고. 나에겐 친구들이 많았다. 깊다고 할 수 있는 관계도,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관계도 있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모두가 바다의 모서리에 걸음을 깔짝거리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우리 시대에 이런 젊음들밖에 만나보지 못했다는 결론을 낼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내 인생에서 말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미흡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적당히 처신한다면 이런 미흡한 관계들도 이어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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