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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탄 리 May 29. 2024

소년화가 P군

소품집

 부산 XX고등학교에 다니는 P군은 미술 지망생이다. P군은 언제부터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렸다. 학교에서, 전까지 공부만 하던 P군은 이제 공부를 하지 않았다. 공부로부터의 해방인가.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P군은 당장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좋은 대학에 못 가는 것도, 미대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도 P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P군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는 조급했던 것일까? 하고 싶은 것을 조금만 참고 적어도 입시 미술에라도 매진한다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P군은, 그 행위는 예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믿었다. 또 이 17세의 P군은 학원, 학교, 대학, 군대, 그리고 취직이라는 이 사회의 암묵적인 룰을 깨부숴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P군은, 미술을 하기 위해서라면 적어도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읽었던, 고흐, 고갱의 자서전과 카미유 피사로의 화집 때문일까. 아니면 16세의 P군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는 숲, 들, 산이 보이는 곳, 강, 호수를 찾아다니며 스케치를 했다. 현대적인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 곳을. 처음엔 목탄과 볼펜으로 스케치를 했다. 그것이 질리자 오일파스텔과 색연필로 인상을 색칠했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 명암이 차가운지 따뜻한 지도 가르쳐주지 않는 입시미술에 시간을 빼앗기느니, 진짜 화가가 될 수 있는 자기만의 화가 수업을 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현대미술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상주의라는 무기가 얼마나 약한지를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고집을 내세워 날마다 그림을 그렸다.
 당시 부산 XX고등학교의 미술교사 B선생은, 수업시간의 P군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데생도 엉망이고, 색채도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절대 입시용 그림은 아니다. 하지만 P군의 그림 속에는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 같은 것이 있다. 그 에너지는 화면을 뚫고 나오려 한다. 고갱의 타히티 그림이나, 이중섭의 황소 시리즈를 봤을 때의 느낌이랄까.”
 P군은 그런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 P군은 심지가 당당하고 사람의 말에 잘 휘둘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B선생의 말을 들었을 때는 몹시 흥분되었다.
 “하지만”B선생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완성도이다. 습작을 많이 쳐나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완성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지 못한다면, 습작은 영원히 습작으로 남을 뿐이다.”
 그 말을 들은 P군은 그날부터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데 주력했다. 언젠가 야자시간에 B선생의 배려를 얻어 미술실에서 P군은 작업을 하게 되었다. 한참이 지나도 친구가 나타나지 않자, P군의 친구 몇몇은 P군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복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3반을 지나고 5반을 지나고 결국 2층에 있는 미술실 입구까지 다다랐다. 입구 문을 열자, 스탠드 하나만 켜놓고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P군을 그들은 발견했다.
 P군에게 다가가 그들은,
 “차라리, 미술학원에서 그리는 게 낫지 않냐?”
 하자,
 “난 미대 안 갈 거라 괜찮아.”
 P군이 대답했다.
 “미대 안 가고 어쩌려고 그래, 너 지금도 공부 제대로 안 하잖아.”
 “나한텐 대학도, 공부도 중요한 게 아니니까,”
 “다른 애들은 헛일하는 것 같냐? 우리는 뭔데 그럼?”
 그중 하나가 약간 언성을 높였다.
 “늘 말하지. 한국 교육은 썩었다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도, 대학에 간 걸 후회하고 다른 길을 찾아. 그제야 자신이 뭘 좋아하고 잘하는지 생각하게 되지. 이상하고 웃기지 않냐. 그건 초등학생 때 미리 다 했어야 했는데. 수학 익힘책처럼 말이야. 선배들한테 들은 말이야.”
 P군이 말했다.
 그 말에 한 명이 화가 나 소리를 치려했다. 그 낌새를 알아챈 다른 한 명이 그만 가자라는 신호를 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친구들은 갔다. P군은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P군은 동이 터오기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는 멀찍이 서서 그림을 바라보고, 다시 가까이 다가가기도 하며, 최고의 완성도를 찾아내려 애썼다. 해가 뜰 무렵이 오자, 정신이 퀭해지고, 코끝이 시려오고 시작했다. 그는 이제는 집에 가야겠다 싶어 화구를 정리했다.
 다음날, 그 그림을 본 B선생은 화실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학생이 있는데 그림을 봐달라고 말했다. 그 친구는 작가로 활동하는 친구였다. B선생은 친구 밑에서 P군이 작가수업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진으로 온 그림을 보고 친구는 작품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를 지도할 테니 자신에게 보내 달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 회비는 받지 않겠다고.
 B선생의 소개를 받고, P군은 A화가의 화실에 갔다. 화실에선 지독한 유화 냄새가 풍겨왔고, 약간 지저분한 느낌이었다. 벽에는 여러 명화 모작들이 걸려 있었고, 조명만은 유독 밝았다. P군은 습작 몇 점을 A화가에게 보여주며 완성도를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화가는, 스타일은 너무 좋다며, 엉뚱하고 덜 가공된 투박한 느낌이지만, 이 스타일을 고칠 필요가 없다고, 만약 입시미술학원에 갔으면, 스타일은 뭉개지고 그림은 공장의 통조림 캔처럼 가공되었을 거라고, 잘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날로 P군과 A화가는 사제지간이 되었다. A화가는 P군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붓 쓰는 법, 색 섞는 법,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을 구분하는 법, 마띠에르를 적절히 활용하는 법, 그리고 유화를 쓰는 방법까지도.
 P군은, 강물이 바닷물에 섞여 들 듯이 자신의 빈약한 지식에 A화가의 지식을 받아들였다. 또 빈 강둑이 물로 채워지듯이, A화가의 가르침을 흡수해 나갔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수능을 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P군은 맨날 숲을 쏘다니며 그림을 그렸을 뿐,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P군은 수능장에서 모든 문제를 다 찍고 나왔다. 남은 시간에는 낙서를 하거나 엎드려 잠을 잤다.
 수능을 친 그날에도, 산꼭대기 학교를 내려오며 P군은 스케치를 했다. 바닷가의 하늘과 구름, 엉킨 전신주 선들, 해풍에 쪼그라든 집들의 지붕과 벽, 그리고 바닷바람이 드나드는 골목길을. 그리고 P군은 화실에 가서 그 그림을 20호짜리 유화로 옮겼다. P군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길에 더욱 확신을 가지며 말했다.
 “난 될 놈이야.”
 그때, 수능을 마친 아이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산 위의 학교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언젠가 처음 개인전을 할 무렵, P군은 자신이 그때 수능을 치지 않았음을 후회한 적이 있다. 대학에 가서 교원자격증이라도 땄으면, 20대에 강사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그럼 그렇게 굶주린 20대를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P군은 자신이 그려온 그림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를 하지 않았다. 개인전 DP를 마치고서도 그는 근처의 숲으로 갔다. 실개천이 흐르고 있는 숲으로. P군은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숲을 사생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빛이 어슴푸레 들어오고 있는 숲을. 그리고 나무 냄새, 토양의 감촉, 바람, 새소리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개인전을 연 사실보다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행복했다. 고흐도, 숲에서 무릎을 꿇고 그림을 그렸지 않았던가.  
 10년이 지난 뒤, 그는 떠오르는 신인작가가 되었다. 그는 습작을 시작했던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했던 인상주의적인 습작들이, 미술시장에 그 어떠한 파동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데에 관해선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내가 했던 일은 근본적으로 옳다. 인상주의에 대한 나의 관심은, 이후 표현주의로 진입하는 데에 도움을 줬고, 추상 표현주의의 화가들을 몇몇 내게 알게 해 줬으며, - 드쿠닝, 잭슨 폴락 같은 - 내 회화의 전신이 된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작품세계나, 카스파르 프리드리히의 낭만적인 작품들이나, 신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야수파, 청기사파, 초현실주의 등 많은 작가들에게로 가는 교두보 역할을 해줬다. 난 결국 내가 옳다고 느끼는 것을 그렸고, 지금도 옳다고 느끼는 것을 그리고 있다. 그랬기에, 사춘기시절의 습작이 쓸모없었을 뿐 아니라 대학 입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습작이 아니라 입시가, 오히려 내게 그 어떠한 도움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P군은 그림을 그렸다. 숲에서, 강가에서, 호숫가에서, 들판에서. 그의 까까머리는 늘 땀에 젖어 있었고 태양광으로 인해 피부는 까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늘 이글거렸고 튼튼한 다리는 땅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의 등에는 책가방이 매달려 대롱거렸다. 그날도 누런 해가 숲을 통과해 나무와 나무 사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P군은 해가 주황색으로 울부짖을 때까지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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