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커피탄 리 May 28. 2024

고갱 - 열대섬에서의 하루

소품집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이 짙게 깔린 밤. 나는 술에 절은 몸으로 오두막으로 들어간다. 푸르스름한 산맥을 한 번 굽어보며 오두막 앞에 서 있는 야자수를 헤친다. 밀짚모자를 식탁 위에 벗어놓고 성냥불을 켠다. 어둠 속에서 테후라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친다. 그녀의 알밤 같은 눈동자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녀의 나체로 엎드린 몸은 경직되어 있다. 죽음의 신을 만난 사람처럼 두 팔을 벌려 베개에 닿게 하고 있다. 유황빛을 내쏟는 눈동자가 캄캄한 밤하늘의 달처럼 빛이 난다. 그녀가 그렇게 겁에 질려하는 건 처음 본다. 팔을 움직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녀에게 내 신원을 밝히고, 침대에 앉아 차가운 등을 쓸어내려 준다. 그녀는 그제야 공포를 떨쳐 보내고 말을 한다. 죽음의 유령 투파파우를 본 것 같았다고. 잠에 들지 못하는 밤에 마오리족을 덮치는 악마. 겁에 질려 굳은 그녀의 표정이 내게는 어찌나 아름다워 보였던지. 순간 섬광처럼 내 뇌리를 스치고 가는 인상이 보인다. 자리에 눕지 않고 그대로 이젤 앞에 앉는다. 남빛 배경에, 하얀 침대와 침대보, 엎드려 있는 마오리족 여인 테후라를 스케치한다. 타히티의 밤은 덥다. 실바람만 약하게 오두막 문풍지 사이로 드나들 뿐이다. 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종이 위로 서걱서걱 쓸리는 연필 소리가 그 어떤 소리보다 크다. 산 너머에서 빛이 세어든다. 아침의 붉은빛이다. 붉은빛은 내 얼굴을 요리조리 찔러온다. 초벌칠을 마치고 붓을 내려놓는다. 잠이 껜 태후라는 천치마만 걸친 차림으로 내 뒤에 서 있다. 작은 손으로 내 어깨를 만진다. 그녀의 손을 한 손에 쥔다. 손에 입을 맞춘다.


 한낮의 태양은 뜨겁다. 노란빛으로 찌그러지는 태양빛에 마른풀들이 꼬랑지를 내린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곳엔 백마를 탄 여자들이 있다. 그들을 빠르게 스케치한다. 야자수가 흙바닥에 서늘한 그늘을 던진다. 수프 끓이는 냄새, 썩은 열대과일 냄새가 풍겨온다. 이들은 내게 몸을 내어준다. 내가 이들을 마음껏 그리도록. 저기 나를 힐끗 돌아보는 세 여인. 그녀들이 먹을 감으며 내게 손짓한다. 그들의 뒷모습을 그린다. 한 남자가 어깨 양 옆으로 내려오는 지게를 지고 수풀 속에서 나온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 그들의 목소리를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곳의 수풀은 세상의 어떤 초록보다 짙푸르다. 동시에 짙푸른 냄새가 난다. 순수한 비리디언 색이 있다면 이 색일 것이다. 이 나뭇잎을 갈아 아교로 캔버스 위에 붙이고 싶은 충동이 든다.
 구름은 산봉우리 위에 늘어져 있거나 날개를 떨구고 있다. 야자수는 천방지축으로 제 팔을 벌린다. 마구간의 냄새나는 말들, 집 뜰 앞에 풀어놓은 검은 돼지들이 보인다. 원주민들은 앉아서 풀을 보거나 말에 사료를 주고 있다. 이들이 풍기는 냄새는 얼마나 태고적인가. 이들의 소리는 얼마나 원시적인가. 이들의 색감과 에너지에 매료된다.
 풀숲을 지나서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간다. 십 수 명의 남녀가 각양각색의 말을 몰고 해안가에 서 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문명에 때 묻지 않은 이들. 고요한 파도소리. 파도를 피하는 말 울음소리.

나는 이들을 피해 숲 그늘로 들어간다. 해먹이 있어 거기 걸터 눕는다. 흔들리는 해먹 안에서 간 밤 자지 못한 잠을 보충한다. 짙푸른 큰 나뭇잎 아래는 서늘하다. 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말 타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서 내가 보고 느낀 모든 것들이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눈을 감고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원시는 문명이 내게 줄 수 없는 것을 준다. 문명인들이 결코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이곳의 빛과 색채는 날 사로잡았다. 이 앞에서 불멸의 영예도, 재화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난 잠에서 깬다.
 모래 위로 해가 붉게 쏟아진다. 토양도 붉다. 풀은 더없이 짙푸르다. 얼굴 크기보다 큰 말랑말랑한 망고를 들고,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이 서 있다. 오두막 앞에서 한 여인은 아기를 업고 있고, 반대편 오두막 앞에선 다른 여인이 머리를 만지고 있다. 흰 꽃을 꽂은 자기 머리를.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여인은 수줍은 듯한 눈길로 날 쳐다본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난다.
 ‘마후테라. 마후테라.(이 여인을 가지게.)’  
 나이 든 영감쟁이들이 했던 말. 그것이 이곳의 풍습이다. 그렇게 얻은 여인이 테후라였지. 문명세계에 대한 애수에 젖어 있던 고독한 내게 사랑을 준 소녀. 나는 어느덧 집 앞에 서 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내게 그녀가 말한다. 유혹하는 목소리로. 나는 침실로 들어간다. 옷도 입지 않은 상태로. 매운 담배 연기가 방을 메운다. 테후라는 부드러운 새 깃털로 내 배를 쓰다듬는다. 눈이 점점 감긴다. 눈이 다시 열린다. 사방이 고요하고, 하늘은 선홍색으로 타오르고 있다. 미지근한 밤은 가라앉기 시작하고, 차가운 별들이 바다 위로 떠오를 준비를 한다. 나는 성냥불을 켜고 작업대 앞으로 간다. 손으로 캔버스를 만져본다. 끈적끈적한 물감이 아직 덜 말랐다. 오늘 낮에 스케치했던 자료를 꺼낸다. 다른 캔버스에 구도를 잡는다. 황금빛으로 흔들리는 들판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을 그린다. 붉은 바지를 입고 하얀 메리야스를 입은. 머리를 뒤로 묶고 앞에는 꽃을 꽂은. 그녀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의 그림 속에서 그녀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처럼 박제되어 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뇌리에 뚜렷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지금 이 붉은 버밀리온 빛에 취해 있다. 퍼머넌트 옐로우 라이트를 하늘에 칠한다. 후커스 그린으로 전경의 풀을, 코발트와 비리디언을 적절히 배분해서 후경의 산을 칠한다. 테후라가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 눈은 오직 캔버스에
고정된다. 내 손은 신기에 들린 것처럼 춤을 춘다. 등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창밖을 보니 누런 조각달이 타오르고 있다. 붓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간다. 파이프에 성냥불을 붙인다.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연기가 보랏빛 구름의 행렬에 섞여든다.
 어느새 바닷가까지 나와 있다. 파도 소리가 거칠다. 발걸음을 돌린다. 오두막으로 들어간다. 테후라가 새근새근 코를 곤다. 안방을 지나쳐, 창고로 간다. 작업들을 모아 놓은. 어느덧 70여 점이 쌓였다.
 잠이 오지 않는다. 마르지 않은 그림 앞으로 간다. 마르지 않은 곳 위에, 물감을 펴 바른다. 색이 섞여든다. 탁해진다. 동녘에서 해가 떠오른다. 그림이 점점 밝아진다. 방 안도 밝아진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붓이 손가락에서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전 05화 천재냐 범재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