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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탄 리 May 26. 2024

아내와 나

소품집

아내는 한 손으로 아이를 품에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석양을 움켜쥐려 다. 갈대들이 찝찝한 바닷바람에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며 내 팔에 스쳤다. 반팔 차림이라 갈대가 닿는 부분이 가려웠다. 나는 노을의 붉은빛에 놀라 잠시 입을 헤 벌렸는데, 초파리들이 그 틈을 타고 내 동굴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아내는 나보다 한참 앞에 있었다. 시커메진 아내의 몸은 배를 타고 먼바다로 떠난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자의 몸 같았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먼바다까지 흘러갔다. 먼바다에는 배 한 척이 있을 뿐이었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어부는 그물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다 쪽으로 벌리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잡아 내 몸 쪽으로 살며시 끌어당겼다. 아내는 날 바라보았다. 나는 미소를 지어 날 바라보는 아내를 응대했다.


 아내는 출산을 하기 전까지 NGO단체에서 일을 했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아내로서는 소박하게 꿈을 이룬 것이었다. 초반에는 일이 재밌다고, 날더러 "자기도 이리로 넘어와" 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글 쓰는 일이 지루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원래처럼 살기로 했다. 초등학교에서 특수교육실무사로 일하면서 글을 쓰는 지금처럼.

 아내는 늘 해외에 나가고 싶어 했다. 아내는 대학 시절에 중국 유학 경험이 있기도 했고, 좁은 한국, 거기서도 좁은 서울을 벗어나 큰 세계, 열린 세상으로 가고 싶어 했다. 그중에서도 가고 싶었던 곳이 중앙아시아였다.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나도 바라왔던 곳이었다. 대학 시절 선교를 꿈꾼 적이 있는데, 중앙아시아의 낙토라고 불리는 키르기스스탄에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하간 아내는 꼭 해외에 나가서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살려하면 돈이 필요했다. 더욱이나 우리에겐 이제 애가 딸려있지 않은가.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해외 파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애를 놓고 해외에 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내는 아무리 해외에 나가고 싶어도, 애를 놓고는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 방 안에 들어가 한참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그러니, 우리 가족이 어느 정도의 물질적, 언어적 준비가 될 때까지는 해외에 나갈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아내를 보고 적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내는 처음부터 일에 미쳐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같은 학교를 다니던 학부 때에는 공부보다 놀러 다니는 데에 더 관심을 쏟았. 편입을 하고 나서는 사람이 달라졌지만. 우리가 다니던 학교는 섬에 있었다. 늘 비바람과 물안개에 능욕당하는 섬이라, 우리는 항상 섬에 갇혀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보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 많았는데, 그럼 영락없이 기숙사에 있는 것이었다. 물론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학교에서 바다가 바로 보이고, 바다 위에 점처럼 떠 있는 배들을 볼 수 있지만. 학교는 섬 꼭대기에 있었다. 난 1학년 때부터 특이했는데, 그림 노트나 글 노트를 들고 학교 구석구석을 다니며 노트를 채웠다. 나는 빛이 드는 숲을 좋아했다. 빛이 들면 나무의 울퉁불퉁한 피부가 드러나고 그 뒤로 그림자가 존재자의 증거처럼 새겨졌다. 그 모습이 좋았다. 나는 붓팬으로 나무를 드리우고 그림자를 드러냈다. 그럴 때면 얼마나 희열이 느껴졌던지. 또 연둣빛의 나뭇잎을 하나하나 새겨 넣을 때, 나는 나뭇잎과 악수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사람들의 인식 속에 살인 진드기가 살아 있지 않던 때라, 풀밭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을 수 있었다. 나는 풀밭에 앉아서 햇빛을 쐬거나, 나무 그늘 안에서 글을 적곤 했다. 그것이 내 날마다의 삶이었다. 전공 공부보다 그렇게 지내는 게 더 즐거웠고, 나는 그런 삶의 방식을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의 아내가 어느 때나 다름없이 풀밭에 앉아 있던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는, "뭘 하는 거예요?"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갑자기 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오자 엉겁결에 "그림"하고 소리를 치고 말았다. 눈이 커다래진 그녀는 꺌꺌 웃더니, 옆에 앉아도 되냐며 내 동의도 없이 내 옆에 앉았다.

그곳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잎 무성한 보리수나무 아래였다.

 우리는 그렇게 친해졌고 서로를 알아가게 되었다. 아내는 말수가 많았다. 나는 아내에 비해 말수가 현저히 적었다. 아내는 말이 빨랐고 기억력이 좋았다. 아내는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이 많았다. 매일 밤 그녀는 정말 오만 주제의 다큐를 찾아봤다. 그러느라 늘 새벽 늦게 잠들었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러니, 오전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처음에 내게 다가올 때와 달리, 수줍음을 많이 탔다. 스킨십을 제안한 것도 항상 나였고, 애정 어린 표현을 말로 내뱉는 것도 항상 였다. 그녀는 나의 적극적인 표현법을, 적어도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했다. 그녀는 우리가 사귀게 된 후, 주변에 우리 관계를 알리기 싫어했다. 소수학과인 우리 과의 특성 때문이었다. 인원이 적은 학과의 특성상,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소문이 매우 빨랐기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다고 했다. 나는 아무렴 괜찮았는데. 아내는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그로 인해 피곤해지는 상황이 싫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학과에서 실수를 하면 우리 이름이 아이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수순이었으니, 아내는 그런 상황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난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아내는 성향 자체가 예민했다.

 

 바다 노을을 다 본 후 우리는 차로 갔다. 아내는 아이를 안고 있고 싶어 했으므로, 운전은 내가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해안 도로로 지나갔다. 해안 도로엔 차들이 많았다. 차가 밀리는 바람에 바람은 쐬지 못했지만, 우리는 어둠에 잠식되어 가는 바다 풍경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번에도 해외, 나가긴 어렵겠지?"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시선을 자동차 백미러에 둔 채.

 "그렇지. 어렵겠지."

 아내가 말했다. 아내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돈을 조금 더 모아보자. 해외에서 딱 첫 해 살 수 있을 정도로만. "

 내가 말했다. 그러나 아내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러려니 했고 우리 차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앞 차를 쳐다보았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종로였다. 우리는 종로에서 자주 데이트 했는데, 데이트라 해도 종로를 통째로 걸어서 도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내는 종로 특유의 아늑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경복궁에서 안국역으로 가는 길에 있는 들판과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길을 정말 좋아했다. 연인이 되기 전 아내와 들판 길을 걸은 적이 있었는데, 영화 ost가 흘러나왔다. 날은 저물고 있었고 노을이 하늘에 붉은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스름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차들은 소음을 일으키며 도로 위를 달렸고, 아이들과 나들이 나온 사람들은 아이들을 보며 웃었다. 그때 어디선가 버스킹 하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들판의 풀들과 사람들, 구름들을 비롯한 모든 사물과 사물의 색채들이, 그 노래와 뒤엉켜 춤을 췄다.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이후로는 그장면을 본 적이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종로 일대를 자주 돌아다녔다.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결혼을 했다.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결혼을 하니 초기에는 몹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결혼한 그해 특수교육실무사 자격증을 따 놨다는 데에 있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던 나는 곧바로 취직이 되었다. 아내는 1년 더 걸려 NGO단체에 취직을 했다. 아내가 취직준비를 하던 그 기간 동안 내 월급이 나왔기에 망정이었다. 우리는 바로 애를 가지지 않았다. 아내가 취직을 하면 애를 가지자고 아내와 상의를 했다. 그 대신 신혼생활의 기쁨은 톡톡히 누렸다.

 나는 일도 하고 글도 써야 했으므로 하루 24시간이 모자랬다. 아내는 사람이 필요한 사람이었고, 나는 사람이 그다지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둘이 함께 하니 한쪽은 지칠 수밖에 없었다.

 나와 함께 하니 아내는 지쳐가는 듯이 보였다. 출산을 한 후, 아내는 산 후 우울증이 생겨서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이었고, 하루 종일 아내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아내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어주려 노력했다. 애가 나오고 나서는 그 증상이 더 심해졌다. 아내는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글 쓰는 것을 그만두고 집안일과 학교 일을 번갈아 해야 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은 글이 아니고 아내이니까. 아내가 회복되기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아내의 증세의 심해질수록, 아내는 해외를 더 갈구했다. 아내는 애를 돌볼 때가 아니면, 거의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보며 해외 정보와 해외 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런 아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아팠고, 아내와의 상의 끝에 정신과 상담을 받기에 이르렀다. 약을 먹은 뒤, 아내는 차도를 보여, 일을 다시 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잠이 늘고, 말 수가 줄어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주말마다 아내와 아이를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서, 오늘도 1박 2일 코스로 부산으로 와서 바다를 봤던 것이다.

 다른 취미를 가져 봐라, 운동을 해 봐라, 재미있는 티브이 프로를 봐라 하는 둥의 조언은 아내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런 조언을 할 때면 아내는 시무룩하게 방바닥을 바라보고, 바닥에 지도를 그리는 연한 빛을 바라봤다. 나는 아내를 조금이라도 더 낫게 하고 싶었으니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아내를 도우려고 했다.

 낙동강의 노을빛이 다 해가고 있었다. 차는 해안도로를 타고 올라가 사하구를 지나 사상까지 다다랐다.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달렸으므로 비릿하고 생기 있는 강바람이 계속해서 차창 안으로 들어왔다. 낙동강은 이제 어둠에 파묻히기 직전이었다. 도로 위의 차들은 불빛을 켜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기야, 요새 나 때문에 많이 힘들지?”

 아내가 말했다.

 “으응? 아냐. 힘들긴 뭘….”

 “말은 안 해도 많이 힘들어하는 거 알아. 내가 맨날 해외 가고 싶다고 찡찡대기나 하고.”

 “자기, 학부 때부터 가고 싶어 했었잖아. 그때부터 꿈이니 남편인 내가 이뤄 줘야지.”

 “자기, 우리 해외 가지 말까?”

 아내가 말했다.

 “응?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오늘 노을을 보면서 생각했어. 인생이라는 것.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현재 처한 상황 속에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다 해도, 살아가기에 참 보람 있는 것이라고.”

 아내가 말을 이었다.

 “이제 해외를 가지 않게 된다 해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아니, 언젠가 우리 형편이 나아지면 그때 파견 나가게 될지도 모르지. 그땐 은수도 클 테고. 그때까진 한국에서 재미있게 사는 거야. 우리,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내가 쳐져 살아야 되겠어? 나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인데? 힘들어도, 앞으로 나아가야지. 그 방법 밖에 없는 거 알잖아?”

 아내가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아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짭짤한 강바람을 들이마시며. 차는 곧 터널로 진입했다. 나는 창문을 올려야 했다. 터널 안에는 차들이 별로 없었다. 뒷 차가, 붉은 광선을 그리며 우리 앞을 추월해 갔다. 나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내 손에 자기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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