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양과 나는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T양과 나는 같은 반 같은 분단이었다. 우리는 같은 반대표 달리기 선수이자, 학교 육상부 소속이었다. 그때 T양이 트랙을 질주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T양이 참 아름답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T양이 바통을 주러 우리 반 선수 가까이 다가오면, 덩달아 나도 가슴이 뛰곤 했다. 나는 같은 반 주자였으나 바통을 받는 입장은 아니었다. 나는 바통을 주는 입장이었다. 우리 반에서 달리기가 가장 빠른 아이는 K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K군을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K군은 이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T양과 나는 같은 분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T양은 내 뒷자리에 앉았고, 내 옆엔 S군이 앉아 있었다. S군과 나는 같은 게임을 하기 때문에 친했는데, 어느 날 T양이 자기도 그 게임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T양을 좋아하는 티는 안 내고 있었기 때문에, 게임을 같이 하자고 적극적으로 말을 하지는 못했다. T양도 굳이 나와 같이 하자고 말을 하지 않았다. T양 역시 쑥스러웠기 때문일까. 우리의 위청수 S군이 중간에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너 어디 섭(서버의 준말)이야?”
“나, a서버야. 너는?”
T양이 말했다.
나는 덩달아 “우리도 a서버잖아, S! T, 너는 무슨 직업인데?”라고 흥분해서 말했다.
S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고, 우리 셋은 게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T양은 내가 무슨 말말 하면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내가 욕을 섞어서 웃기게 말해도 미소를 지었다. T양의 눈꼬리에는 주름이 있었는데, 둥근 안경 속에서 살에 파묻히는 그 눈꼬리는 내게 아름다워 보였다. 이목구비가 큰 편은 아니었다. 아무튼 T양과 나는 같은 육상부를 하기도 하고, 게임 얘기를 하기도 하면서 친해졌다. 신기하게도 T양과는 5학년 때도, 6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었고, 우리는 거의 떨어지지 않고 같이 놀았다. 그러다가 우리가 헤어지게 된 계기는 나의 이사였다. 나는 6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부산으로 이사 온 후 나는 T양을 잊고 살았다. 나는 중,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방황을 하다가 미술 대학에 갔다. 그리고 대학에서 만난 여자 친구와 작년 말 결혼을 했다. 내 나이는 올해 서른한 살이다.
반복되는 회사생활에 지쳐있던 어느 날, 나는 하루 연차를 내게 되었다. 이 황금 같은 휴가에 아내와 뭘 할지 고민을 하다가, 당일치기 여행을 가자는 의견이 아내의 입에서 나왔다.
“자기야, 어디로 가고 싶어?”
라는 아내의 말에 나는 대뜸 A라고 말했다. A군은 내가 부산으로 이사오기 전에 살던 곳으로, 내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들이 많이 묻어 있는 곳이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말했고 아내는 내 말에 수긍했다. 우리는 A군으로 가게 되었다. 나와 아내는 차가 없어서 기차를 타고 A군으로 갔다. 그날 날은 맑았고,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있었다. 기차가 부산을 지나자마자, 논밭과 구릉, 산들이 펼쳐졌고, 그 모습은 동화 같았다. 햇빛은 구릉 위로, 산 위로 제 몸을 뿌려주었고, 그렇지 않은 부분에는 푸르스름한 그림자가 졌다. 비록 사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거나, 참새들이나 까마귀가 우짖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나는 숲 속 정원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기차 유리창에 대고 “우와, 우와”를 연발했고, 아내는 “제발 애 같은 짓 좀 하지 말라”며 나를 말렸다. 아내는 임신 3개월이었다. 배는 아직 불러 있진 않았으나, 나는 기차 안에서 자주 아내의 배에 손을 대고 생명의 숨소리를 느껴보려 했다. 아내의 배를 보고 아내의 눈을 마주치면 나는 까르르 웃었고, 아내는 애써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차는 2시간 여 만에 A군에 도착했다. A군은 부산에 비하면 여전히 아주 시골이었다. 부산은 대로변도 – A군에 비해 넓고 – 빌딩들도 큼직큼직했는데, A군의 건물들은 모두 6층 안팎이었다. 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내가 살던 동네로 접어들었다. 마을 초입에 있는 A중학교 건물이며, 낮은 집들 산들이며, 내가 이사 갈 때 즈음 지어진 공설운동장이며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아내는 내가 살던 집과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십 분 정도를 걸어 초등학교 쪽으로 내려갔다. 초등학교 주위는 정말 그대로였다. 논밭이 하나도 다른 무언가로 바뀌지 않았고, 주위의 집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와 나는 학교 앞에 다다랐고 경비가 따로 없는 걸 확인한 뒤에,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다닐 때는 스탠드가 없는 학교였는데, 지금은 스탠드가 있었다. 나는 아내를 스탠드에 앉혀 놓고 근처 카페에 커피를 사러 갔다. 내가 커피를 사 왔을 때는, 아내는 스탠드에 없었다. 그늘에 앉혀 놓으려 했더니, 그새 햇빛이 있는 대로 나갔나 보다 하고 있는데, 저쪽 운동장 구석에서 아내를 발견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다가가려 했다. 그때 그 순간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느낌이 드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여자가 있었는데, 아기를 안고 있었다. 여자는 마른 체형에 안경을 쓰고, 뒤로 말아 올린 머리에 회색 카디건에 흰 치마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를 쳐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나를 계속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여자를 유심히 보았다. 어딘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내가 어디서 본 누구였더라. 하고. 머릿속 계산이 초등학교 6학년때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순간 T양을 떠올리게 되었고, 저 여자가 T양이라는 확신을 반쯤 가지게 되었다. 나는 그리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혹시, 너 T양 아니니?”
“어…. 맞는데"
하고 그녀가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럼… 넌 혹시 P?
우리 두 사람은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이게 얼마만이냐며 악수를 주고받았다. T양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3년 전에 결혼하고, 결혼하자마자 어릴 때 살던 이 동네로 와서 살고 있다고.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내게 보여주었다.
“어때? 나 닮았지?”
내가 본 바로는 T양을 닮지 않았다. 아기는 남자아이였다. 첫째가 남자애면 보통 엄마를 닮는다는데, 아기는 T양을 하나도 닮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남편은?”
내가 물었다. T양은 남편이 화창한 봄날에 회사 야유회에 갔다고 말했다. 자기는 애를 보느라 보다시피 묶여 있는 몸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여유롭게 동네를 둘러볼 수 있어서 나름 좋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새삼스레 T양과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육상부에서 장난 삼아 투포환을 던졌던 일이나, 운동장 30바퀴를 뛰고 지쳐서 트랙 위에서 음료수를 마셨던 일이나, 반 안에서 게임 이야기를 했던 일이나, 여자애들을 놀리고, 잡히러 다녔던 일들 등. 내 눈시울이 붉어지려 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들이 하늘로부터 빛을 받아 그 반사된 빛을 다시 땅에 흩뿌리고 있었다. A초등학교 인조잔디 운동장은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푸르스름하던 하늘은 노란색과 연보라색이 섞인 색으로 빛이 났다.
“나도”
내가 말을 이었다.
“결혼을 했어.”
T양은 신기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내 이야기를 잠시 동안 했다. 그러자, 그녀가 더없이 편안하게 미소 지으며 내 어깨를 톡톡 쳐 주며, "고생했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고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그녀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 운동장 끝에서, 아내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T양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T양은 벌써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아내는 멍하니 서 있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자기야, 아까 그 사람 누구야? 누구랑 말 그렇게 오래 한 거야?”
“응, 친구야. 옛날 친구.”
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