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군이 날 떠나고 나서는 아무하고도 안 놀고 싶어졌다. 바다에 가는 것, 책을 읽는 것이 일상에서의 내 유일한 탈출구. 다행히 책 속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들은 하나같이 생김새가 개성이 있고 말을 재미있게 한다. 그들하고 있으면 내가 심심한 줄 모른다. 그들은 나와 비슷하게 외롭고 사연이 있다. 그들은 진정한 내 친구이다.
난 사람 친구를 찾지 않고 고등학교를 보냈다. 대학입시를 할 때 K군에게 연락을 해 본 적이 있다. K군의 뉘앙스는 날 기억하지 못하는, 날 새롭게 기억하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를 추억하지 않는 그것이었다.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난 책 속 친구들이랑 놀거나 자연 속 친구들이랑 놀았다. 그들은 낮마다 밤마다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들하고 노는 게 제일 재밌다. 여기서는 세 명이 모여도 이야기만 할 뿐 누군가를 따돌리거나 하지 않는다. 대학에 와서는, 아니 교등학교 말부터 교회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주말이면, 노란 햇빛이 스며드는 숲 속을 걷거나, 숲 속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렸다. 대학교가 내륙지방에 있어서 바다는 거의 가지 못한다. 내 인생에 K군은 더 이상 없다.
대학에서 우연히 알게 된 친구들이 있다. 나와 비슷한 이들이다. 하나는 조각을 하고 하나는 클라리넷을 분다. 나와 두 사람은 동아리 방에서 과자를 펼쳐놓고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고 난 뒤에는 핸드폰 랜턴을 켜놓고 빈 음료수 병을 거꾸로 그 위에 세워 조명을 만든다. 이제 서로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중학생 때 교회 수련회에서나 하던 행동이다. 술에 취해 있으므로 오만 소리가 다 나온다. 갑자기 클라리넷을 부는 등 돌발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정말 별 말들을 다 한다. 누구네 집에서 일어났던 비밀스러운 일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Y군네 어머니가 계모임에 갔다가 싸우고 온 이야기나, W군의 부모님이 S주식에 투자했다가 잔뜩 잃은 이야기나, 뭐 그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이 이 모임의 안주이다. 여기서 W군은 클라리넷을 부는 친구이고, Y군은 조각을 한다. 나 P는 회화를 한다, 회화 말이다. 나는 서양화를 전공하고 있다. 나는 술에 얼큰하게 취한 Y군과 W군의 초상을 그린다. Y군은 우리 세 사람의 얼굴을 새긴 흉상을 만들겠다고 한다. Y군은 우리에게 돈을 내라고 했다. 한 사람 당 10만 원씩만 내면 흉상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난 거절한다고 했다. W군은 내가 부탁하기만 하면 클라리넷 연주를 해준다. 다른 동아리방에서 시끄럽게 할까 봐 걱정이긴 한데, 이 늦은 밤엔 사람이 거의 없을 테니 상관없다. 우리는 술에 덜 깬 채로 동아리 관 옥상에 올라간다. 시골이라 그런지 별이 잘 보인다. 멀리 부채모양으로 펼쳐진 숲이 보이고 숲 위로는 별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별들은 얼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타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별들을 구경하다가 우리 셋은 옥상 바닥에 드러눕는다. 우리 중 누군가가 말한다.
“난 우리 사이가 영원했으면 좋겠다. 저 별들처럼”
Y군의 목소리다.
“우리 죽을 때까지 친구 하자.”
Y군이 이어 말한다.
그럼 W군이,
“아냐, 아냐, 별들은 영원하지 않다고. 때가 되면 별들은 소멸되지. 초치는 말을 해서 미안한데, 나는 영원한 건 없다고 생각해.”
클라리넷을 부는 W군이 말한다.
나는 잠자코 그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는다. 문뜩 K군의 얼굴이 떠오른다. 까무잡잡하고 까까머리의 K군이. 야구를 잘하고 밤을 새우며 나와 게임을 하던 K군이. K군하고 나도 저런 말을 했을까? 아무렴 나는 흥에 취해 W군이 하는 말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겠어. 우린 우리대로 계속 친하게 지내면 되는 거지.
우리 셋은 찬바람이 술기운을 깨워줄 때까지 옥상에 그러고 있는다. 찬바람에, 나는 콧물을 훌쩍훌쩍 거린다.
나는 이들과의 관계를 사랑한다. 이들과 노는 게 즐겁고, 유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Y군의 바람대로 평생 이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멀리하게 된다. Y군은 음악과의 한 여자애랑 사귀게 되고, 나는 서울의 모 대학 회화과로 편입을 한다. 우리는 각자 바쁘다는 핑계로 5년 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가장 슬퍼한 쪽은 클라리넷을 부는 W군 쪽이다. W군은 언제 한 번 만나면 안 되느냐고 늘상 문자를 보내온다. 하지만 나도 이제는 서울에 여자 친구가 생겨 경상도에 내려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셋의 시간을 맞추기란 더더욱 어렵다. 아니, 실은 그 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마음이 식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 내가 그때의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나서, Y군이 뒤늦게 군대를 갔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즈음의 일이다. 나와 Y군은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고는 있었다.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대학을 졸업한 나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부산으로 돌아온 나는 한 독서모임에 다닌다. 다시 책이 내 친구가 되고, 책 속 등장인물들이 내 가족이 되어 있다. 문을 두드리면 그들은 언제든지 날 환영해 준다. 내가 다니는 독서모임. 독서 모임이라 해봤자 소규모의 4,5인이 나오는 모임이다. 그중에서도 나와 가까운 사람은 두 명이 채 되지 않는다. 우리는 2년 동안 책을 읽고 나누며 몹시 가까워졌다. 특히 우리 세 사람은. 두 명은 나 보다 연상의 여성이다. 난 그 두 사람하고 있을 때가 어떤 친구하고 있을 때보다 편하다. 내게 친누나는 없지만 거의 친누나다. 그들은 내 일들에 대해 잘 조언해 준다. 내가 이 정도 나이가 되어 다시 이 정도 되는 인연을 사회에서 갖게 되다니. 이것도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광안리 바다에서 회동을 가진다. 바닷가를 죽 산책하기도 하고,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모래사장에서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맥주 거품이 파도 거품 갔다며 꺌꺌 대기도 하고, 간식을 먹으러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를 구경하기도 한다. 이런저런 대화를 시끄럽게 하다가, 날이 적당히 무르익었을 무렵, 누군가가 말한다.
“전 이 관계가 참 편하고 좋아요, 두 분은 어떤 것 같아요?”
“저도요,”
“우리 다음엔 다대포에서 볼까요?”
내가 말했다. 내 말에 다들 좋다고 한다. 난 이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은연중에 생각한다.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친해지게 되었죠?”
“글쎄요. 나이도 다 다른데 신기한 노릇이에요.”
“오래오래 이 관계가 유지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요. 하지만 저는 이 관계 또한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안 좋은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그게 순리니까요.
몇 년 전 W군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이다. 난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맥주 캔을 모래사장에 내려놓는다.
광안리 바다에 들이닥치는 흰 파도 소리를 듣는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광안대교를 본다. 그리고 푸르고 깊은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에 갑자기 K군의 얼굴이 떠오른다. K군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난 K군과 영원한 관계가 되지 못했다. Y군과 W군과도. 그렇게 보면 진짜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