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강 쪽에서 큰 안개가 몰려오고 있었다. 습한 바람은 먹구름을 공장단지 위로 드리웠다. 사방에서 비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안개에 잡아먹힌 건물들은 하나 둘 모습이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천재! 이 단어는 거의 10년째 소설가 P군을 괴롭히고 있는 단어였다. P군은 자신이 천재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10여 년을 자신을 괴롭게 했다. 한쪽에서는 ‘천재가 아니라면 뭐 어떨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드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천재가 아니면 문학사에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자의 소리에 의하면, P는 천재가 아니므로, 노력을 해도 매력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고, 이른 나이에 출세하지도 못할 것이며, 몇십 년 글을 써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지 못하는 그저 그런 작가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P군은 거의 날마다 이 소리들과 씨름을 해야 했다. 뭐든 잘하는 G군과, 이른 나이에 이름을 날린 S양에 비하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으므로. 그러므로 누군가 P군의 미숙한 재능을 발견하고, ‘넌 천재가 아니니까 그렇게 밖에 못 한 것이다. 천재가 아니니까 안심해도 된다.’라는 조로 말한다면, 그건 P군의 자존심 문재로 번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자존심으로 말할 것 같으면, P군은 할 말이 많았는데, P군은 미술 부분에 있어서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소유했다는 말을 들어온 터였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려내는 족족 찬사를 받았으며, 천재라는 소리를 들어왔으니, 문학에서 자신이 천재가 아닌 것에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P군은 미술보다 문학을 더 사랑했으므로, 미술에서 받는 인정을 문학에서 받지 못할 때 극도로 우울하고 외로웠다.
P군은 G군을 어려서부터 동경했다. 남자다운 외모와 시 짓는 능력, 소설 속 인물을 만드는 능력과 탐구능력, 창의성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부러웠다. 그런 것들이 G군을 대가로 만들었다고 P군은 생각했다. 19살에 프랑켄슈타인을 쓴 S양의 경우에 있어서도 비슷한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넘어졌다. 본인에게는 그러한 능력들이 없었으므로, 능력 부족이었기보단 그 능력을 발휘할 그 정도의 집착과 열정이 없었으므로, P군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P군은 또 다른 자기 나이 또래의, 평단에 박수를 받은 군, 양들을 부러워했다. P군은 항상 책을 읽을 때마다, 저자 나이와 저자가 그 나이 대에 책을 쓴 연도에 집착하며, ‘아직 나는 그 나이가 안 되었으니까 괜찮아’ 자위하곤 했다. 그리고 그 나이가 된다면, 자기 자신도 그 정도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 굳게 믿고 또 믿었다. 왜 하도 많고 많은 분야 중에서 문학 분야의 인물들만 그가 부러워했을까? P군은 빌 게이츠도 일론 머스크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창작하는 일이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으며 다른 분야의 인물들은 쳐다보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하게 분야가 달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모든 시간 동안 P군은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면 P군은 욕을 먹어도 싼 존재이다. 하지만, P군은 매사에 필사적이었고, 남들이 하는 것보다 두 배는 더 했다. 그런데도 빛은 보이지 않았고, 뭔가를 쓰면 쓸수록 세상에 인정받지 못하고 도태되는 자신의 모습에 암울해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그것은 P군을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 앞까지 가도록 등을 떠밀기도 했다.
그런 싸움을 한 지 10년이 다 된 어느 해였다. P군은 강가에 주저앉아 울고 있기보다는, 스스로 이겨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은 ‘범재면 어떠하냐’ 하는 생각으로 ‘천재가 아니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을 밀어내는 것이었다. 범재가 된다면 문명을 떨치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며 본인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챙길 수 있었다. 그리고 천재가 아니더라도 계속 끊임없이 노력하면 매혹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그 의견을 뒷받침해 줬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 P군은 범재가 되기를 선택할 수 있었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그가 범재가 되기를 선택한 결정적인 계기는 이것이었다. 어느 날 P군은 꿈을 꾸었다. 비행기인지 열기구인지 모를 어떤 비행 물체가 자신의 머리 위를 날아가는 꿈을.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었고, 안개가 자욱했다. 비도 자박자박 땅을 적시고 있었다. 거기다 천둥번개까지 떨어졌다. P군은 비행 물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비행 물체는 P군의 머리 위를 몇 바퀴 회전했다. 비행 물체에서는 이러한 소리가 들려왔다. “천재든 범재든 죽음 앞에 장사 없다” 아, 이 말을 들은 P군의 속이 얼마나 편해졌는지. P군은 그날로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한 기분으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관찰과 메모, 일기 쓰기와 소재 찾기 등 자신이 넘어야 할 산맥이 높아 보여 도저히 하지도 못하고 있던 기본적인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P군은, “안 될 줄 알았는데 하다 보니 이것만큼 쉬운 게 없었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을 P군은 너무도 잘 알았다. 계속 머릿속에서 ‘너는 천재가 아니니 결국은 안 될 것이다’라는 소리들이 P군의 고삐를 당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P군은 안다. 천재냐 범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자기가 가진 소재를 잘 요리하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천재라 할지라도 범재보다 못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자기의 역량을 재미있게 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천재냐 범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즘 P군은 말하곤 한다. “소재, 소재가 필요하다. 내게 소재만 있다면, 내가 범재가 아니라 둔재라도 상관없다.”그러니 우선 소재를 찾고 볼 일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