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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탄 리 Jun 03. 2024

몽상가 연습

소품집

-나는 몽상가일까 관찰자일까(산문시)

1

 촛불을 쓰는 밤이다. 스탠드 조명 대신 촛불을 쓰는 밤. 밤하늘 강에는 별들이 무수한 날갯짓으로 비둘기처럼 내려앉는다. 밤의 영원한 시민인 달은 전나무 우듬지에 금빛 낚싯줄을 내리고 있다. 나무에 둥지를 튼 새들은 두꺼운 나무줄기에 기대 잠을 자고 있다. 수풀에서는 귀뚜리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호수 위로는 배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촛불이 벽에 닿자 P군의 그림자가 마구 종횡으로 흔들린다. P군은 글을 썼다가 지웠다가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다시 책을 앞으로 넘겼다가 뒤로 넘겼다가를 계속한다. 낡은 양피지에 기록된 책들은 커튼처럼 실바람에 부풀었다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한다. P군은 계속 글을 썼다가 지웠다가를 계속한다. P군의 그림자는 벽 위에서 종횡으로 떨리고 있다.

 어느 순간 P군의 커다란 그림자는 책꽂이 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의 그림자는 책꽂이를 덮는다. 촛불은 방의 나머지 부분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 지금은 쓰지 않는 화로, 먼지 날리는 원고 더미, 낡아 다리가 부러진 이젤이 보인다. P군의 그림자는 한참 책꽂이 앞에 서 있다. 책을 살피고 있는지 뽑았다 넣었다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벽에 달린 벽시계가 째깍째깍 울고 있다. 벽시계 위의 부엉이 조각상의 눈에는 불빛이 생겼다 가라앉는다. <답답하고 무료하네.> P군은 그렇게 말하며 창가 쪽으로 간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커튼 레이스는 춤을 추고 있다. 그는 전나무와 플라타너스로 빽빽한 숲을 내려다본다. 가만히.

2

 쿵쿵-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P군의 발소리에 원통형으로 된 집이 울린다. 집안의 사물들, 특히 식기류들이 쨍그랑 쨍그랑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P군의 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주방의 나무 의자들이 덜거덕덜거덕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라- 하고 피아노 건반이 움과 동시에 나무 의자 중 하나도 쿵- 하고 쓰러진다. P군은 이제 현관을 지나고 있다. 그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구겨 신고 현관문을 열어젖힌다-

 P군은 집 밖으로 나왔다. <이제야 숨통이 틀 것 같군.> 그가 말한다. 검은 새들이 나무 우듬지에서 하늘로 솟아오른다. 달빛은 여전히 낚싯줄을 숲과 호수에 드리우고 있다. P군은 숲으로 향한다. 풀들은 이슬에 젖어있다. P군이 풀을 밟을 때마다, 푹신한 흙이 움푹하게 들어간다. 그는 얼른 풀밭을 거쳐 숲으로 들어간다. 숲과 가까워질 때마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온다. 푸르푸르- 푸르르-

 P군이 숲 초입에 들자마자, 온갖 빛깔의 빛나는 열매들이 가지에서 주렁주렁 자라난다. 그는 그 열매 하나를 집어삼킨다. 붉은 과즙이 뚝뚝 그의 손목을 타고 떨어진다. 과즙은 갑자기 홍수처럼 불어나 숲에 순식간에 강줄기를 만든다. 강 저편에서 나룻배 한 척이 흘러오고, 그는 그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한다.

 노를 젓지 않는데도 배는 강을 역행해 올라간다. 나무 사이에선 녹색 지령들이 옛 악기를 연주한다. 푸른색 정령들이 이상한 노래를 부른다. 나무들이 흔들리면서 열매들이 모두 강으로 떨어진다. 열매들은 강을 타고 흐른다. 열매에서는 다시 나무가 피어난다. 숲에서는 말을 탄 사람들이 창을 들고 사슴을 사냥한다. 사슴이 우는 소리가 노랫소리와 어우러져 화음을 이룬다. 열매에서 자라난 나무들이 우거져서는 강줄기의 흐름을 막는다.

 P군을 실은 배. 그 배는 나무줄기를 비집고 나가 강줄기를 타고 유유히 흐른다. 숲의 전나무들과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눈을 뜨고 코를 풀고 입으로 침을 뱉는다. 그들은 굵은 팔과 머리카락을 흔들며 숲 속을 덮어 버린다. P군은 공포에 휩싸이지만 침을 꼴깍 삼키고 마음을 굳게 먹는다.

 저 멀리 하늘에선 별들이 합창을 하고 있다. 별들은 높은 음조로 라단조의 노래를 부른다. 달에서 낚시를 하던 소년은 이제 달에 거꾸로 매달려 바이올린을 켠다. 별들은 더없이 환하게 반짝인다. 황홀해진 P군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숲 사이, 호수 뒤편, 산골짜기에서 태양이 이른 기지개를 편다. 태양은 아직 연한 주홍색의 소매를 입고 있다. 태양의 회백색 하품은 밤하늘 여기저기로 퍼져 노래하는 별들을 소멸시킨다. P군은 그 장엄한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쪼그라드는 달에선 여전히 소년이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P군 또한 입으로 소리를 내며 바이올린을 켜는 시늉을 한다.

 P군을 실은 배는 산골짜기로 흘러간다. 산골짜기에선 부지런한 목동들이 말을 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오늘은 타슈켄트 쪽으로 가보자고.> <상수리나무의 땅인 베델을 거쳐서-> 태양은 이미 숲 구석구석을 물들이고 있다. 음메- 음메- 양 우는 소리도 들려온다. 이상하게 P군에게는 그 소리들이 자장가처럼 들려온다. 자리에 앉은 P군은 고물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는다. 배는 계속해서 강물을 거슬러 흘러간다.

3

 P군은 눈을 뜬다. 차들이 지나다니는 소음, 사람들의 발소리, 자동차 경적음, 매연 냄새, 오물 냄새, 신호등 알림음 등이 그를 활키어 온다. 그가 눈을 들어 바라보니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빌딩들이 온통 그의 시야를 가리고 있다. 그는 거적을 덮고 보도 위에 누워 있고 그의 곁에는 오래된 바이올린이 있다. 그의 앞에는 해진 모자가 있고 모자 안에는 동전 몇 닢이 지폐와 함께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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