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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탄 리 Jun 19. 2024

각자의 하루

 흰빛이 섞인 주황빛의 해는 산머리를 비스듬히 타고 올라 유유히 창공으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달은 제 위치를 찾아 침구를 들고 하늘 계단을 내려가고, 파도는 아직 덜 깬 눈으로 해안가로 몰려들 준비를 한다. 아침 새들은 고통스럽게 우짖는다. 누구는 글을 쓴다. 누군가는 출근하기 전에 담배를 태운다. 누군가는 불면증에 뒤채이고, 누군가는 아직 단 꿈을 꾸고 있다. 누군가는 가족들이 먹을 아침 준비를 한다. 누군가는 벌써 지하철 출근길에 오른다. 누군가는 버스를 운전하고, 누군가는 도로 교통질서를 유심히 살핀다. 누군가는 개를 끌고 산책하고 누군가는 샤워를 하고 있다. 누군가는 거리를 빗자루로 쓸고, 누군가는 빈 건물에 불을 켜고 있다.


 고통인지 새로운 시작인지 모를 아침은 시작되고,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하루를 맞는다. 나는 글을 쓴다. 오늘 써야 할 것들이 많다. 지난 5일간 손님을 맞느라 책도 거의 읽지 못하고 글도 전혀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님을 맞는 일을 피할 수는 없다. 손님을 맞는 일이 고역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글을 쓴다면 당사자인 손님은 자신을 고역 덩어리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손님을 맞는 일은 내게 또 다른 수평으로의 뱃길을 열어준다.


 해야 할 일들은 늘 아마포로 짠 바구니 속에 넘쳐흐른다. 일들은 바구니를 찢고 나와 늘 내 옆구리를 찔러댄다. 딱히 돈을 버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란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약간의 가사이다. 운동도 포함된다. 이 일들의 양이 많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내게는 부담이 되는 일의 목록이다. 순전히 독서와 글쓰기에만 시간을 할애하며 살고 싶은데, 현실은 그걸 필사적으로 막는다. 미래에 대한 많은 고민들이 내 앞을 불의 띠처럼 가로지르고, 불확실한 꿈을 좇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내 가슴을 영국인들이 쏘던 석궁의 화살처럼 찔러온다. 때로는 이 모든 일들 – 글쓰기와 독서 – 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도 든다. 담배 연기 속에 모든 시름을 던져놓고, 시름을 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담배에는 횟수제한이 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른다. 점심을 먹는 시간, 저녁을 먹는 시간 등의 필수적이고 간소한 시간들이 내 일정에 방해를 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외에도 내 살을 갉아먹는 것들이 많다. 매일 빠져야 할 살의 양은 정해져 있는데, 살을 뺄 일만 더 생겨나고 있는 격이랄까. 이러다간 갈비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말겠지. 흐흐. 하고 혼자 웃고 마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가?'라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내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지극히 짧다. 여자친구와 연락을 할 때, 책을 읽을 때, 비인정한 풍경을 볼 때이다. 그리고 글을 쓸 때.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일까?)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딱히 나의 인생의 과업도 아니다. 그렇기에 몇몇 교회나 책에서 말하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이 됩시다.’라는 구호에 온전히 공감을 하지 못한다. 난 오히려 반감을 느끼고 있다. 행복이란 공허한 것이다.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 일을 하지만, 실상 행복한가. 늘 행복한 사람은 조증 약을 못 먹고 있는 조울증 환자의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겪어 봐서 알지만, 그 경우는 늘 들뜨고 또 모험 같은 일들로 세계가 충만해 있는 경우이다. 행복을 찾자는 구호는 거짓이다. 인간은 괴로움을 겪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 괴로움 속에서 어떤 행복을 손에 쥐느냐 하는 것 삶의 과정이라 볼 수도 있다. 삶, 인생과 같은 거창한 단어들은 내겐 아직 과분하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선에서 느끼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위와 같다. 아무튼, 절대적인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을 추구하자는 구호는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자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됐다. 내 인생에 문제는 없다. 문자적으로 봤을 때 말이다. 해결되지 않는 일로 골머리를 섞이느니, 시간의 강물에 내 몸이 쓸려 내려가도록 돌이나 바위를 잘 치우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그러다 보면 몇 번의 행복도 아마 경험하지 않을까?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낮 동안 열심히 일에 취해 일을 한 사람들은 이제 저녁을 맞게 된다. 누군가는 가족들을 야단치고, 누군가는 저녁 산책을 한다. 누군가는 직장에서 돌아오는 대중교통수단에 몸을 던지고, 누군가는 회사에 불을 끄고 기물들을 정리한다. 누군가는 힘없이 혼자 저녁을 먹고, 누군가는 허물어지는 낮의 파편을 보면서 담배를 태운다. 누군가는 벌써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어둑한 곳에서 여자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로 위론, 아까 까지만 해도 출근하던 차들이, 퇴근 소음을 내고 있다. 모두가 지친 목소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하루가 벌써 저물고 있다. 나는 오늘 살았던 삶에 만족하냐 하면 고개를 휘저을 것이다. 내 삶에는 만족함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가 아마 그러지 않을까? 그래도 ‘Life goes on’이라는 노래 제목대로 하루는 흘러가고 또 다른 하루가 다가온다. 이 림보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림보에서 벗어날 방법은 삶을 초월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하지만 그 방법은 너무도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이다. 림보에 갇힌 사람들은 다른 방법을 고안해 냈다. 바로 삶에서 나름의 의미를 발견하는 법이다. 의미를 발견하는 법은 각자 너무나도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달을 보며 산책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계부를 계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일을 주도적으로 성취하는 일일 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과도한 업무에서 벗어나 쉼을 찾는 일일 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을 듣는 일, 어떤 사람에게는 그날의 일화를 주제로 수채화 일기를 쓰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마저 할 시간이 없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시간들을 마련하려 애쓰고 있고, 그런 시간 속에서 만족함을 찾으려 한다.


 ‘각자의 새벽’라는 제목을 가진 노래가 있다. 내가 고교시절부터 좋아했던 재즈힙합 그룹 재지팩트의 노래이다. 노래에는 이러한 가사가 있다.

yeah i'm floatin on the moonlight
think like a philosopher

난 달빛 위에 떠올라서
철학자처럼 생각해

 이 가사는 노래의 훅의 일부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벌스에서 실컷 각자의 새벽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묘사 이후에 나오는 가사이다. 어쩌면, 정말 몽환적으로 달빛 위에 떠올라서 철학자처럼 생각하는 것이 삶의 의미를 발견해 주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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