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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가장 나답게 걷기

by 커피탄 리

나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이다. 옛날에는 말을 곧잘 했던 것 같은데. - 아닌가? - 먹고 있는 약물의 개수가 – 핑계처럼 보이기에 약물 이야기를 하기 싫지만, 내 이야기에서 약물은 뗄 수가 없다. - 늘어날수록, 약물이 정교하게 조합되고 수정될수록, 기억 능력과 상상 능력, 어휘 능력에 있어 한계를 느낀다. 나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다. - 세상에 말형 인간과 글형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글형 인간에 가깝다. -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글로는 수학 공식처럼 증명할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이 회색 지대가 되고, 또 머릿속에서 해야 할 말을 조합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어제의 일도 시원하게 떠오르지 않고, 머리가 마음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을 잘 못하는 것은 내게 콤플렉스가 되었다. 말을 잘해보려고 나름대로 계속 연습을 했다. 대화의 자리에 자주 참가한다거나, 말하고 싶은 바를 – 정확하게는 간신히 찾은 말 할 거리를 – 노트에 메모해서 말한다거나. 그럴수록 체감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출중한 어휘 실력과 그것과 대비되는 나의 버벅거림이었다. 나는 글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말로는 다른 사람들을 이기기는커녕 상대도 할 수 없으니, 글로 내 장점을 발휘해 보자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나는 글을, 아주 긴 글을 한 호흡에 쓸 수 있다. - 하루에 A4 10장은 가뿐했다. - 이것은 내 특장점이다. 한때는 이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한 나머지, 우쭐거리며 몸을 혹사한 적이 있었다. 밤새우며 며칠 그러기를 반복. 또 지나치게 열심히 독서에 몰입한 나머지, 나는 한두 달 만에 탈진해 버리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한 번 번 아웃이 와 버리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글쓰기는 물론 독서까지도. 그런데 번 아웃은 최근 몇 년간 내 인생에서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이런 내 모습을 꿰뚫어 봤던 배 작가님은 내게 ‘천천히 쓰기’와 ‘되돌아보기’를 강조하셨다. 당시의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도 해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최대한 빠르게,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거룩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명은 내 정신을 천천히 좀먹어 갔다. 5년의 시간 동안, 마치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세하던 암이 불어나 암 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그것은 나를 병들게 했다. 다행히 지금은 날 얽매고 있던 사슬을 벗어버린 상태이다. 나는 탈진할 때까지 글을 쓰던 옛 습관을 버렸다. 대신 하루에 A4 1장을 쓰더라도 즐겁게 쓰기로 했다. 모두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쓸 수 없다. 이것이 내가 번 아웃의 굴레에서 탈출하기 위해 고안한 플롯이다. 나에겐 나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글은 그림과는 다른 느낌으로 날 즐겁게 한다. 색과 색이 대비를 이뤄가며 하나의 형상으로 채워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고양된다면, 글은 조금 다른 의미이다. 글은 끄적거릴 때조차도 즐겁다. 교과서 구석에 낙서를 한다고 즐겁지는 않은 것과 반대로 말이다. 내가 잘못된 사명감에 도취되어 내 젊음과 기력을 낭비했더라도, 나는 이 색다른 글쓰기가 즐겁다. 글쓰기는 피아노 건반만 누르면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이다. 이 이상 어떤 말로 나의 글쓰기를 정의할까. 그렇기에, 어떤 종류의 글을 쓸 것인지는 더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소설이 아니면 어떻고 또 시가 아니면 어떤가. 시가 아닌 다른 무엇이면 어떤가. 위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사명은, 내가 소설가나 시인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부록도 삽입했다. 내 욕망으로부터. 내가 보기에, 세상의 이름난 문인 중 소설가나 시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괴테, 실러, 릴케, 하이네, 헤세. 내가 존경하는 독일의 문인들이 그랬다. 그 천재들은 세상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괴물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의 위치에 감히 오르려 했다. 따지도 못할 감을 따려 나무를 바라보는 게처럼. 주제에 맞는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내 주제를 몰랐다. 나는 그들보다 못한 부류가 아닌, 그들과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신은 내게 조금의 미술 재능과 약간의 글쓰기 재능을 주었다. 내가 그걸 내 방식대로 개발시키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남들과 같아지려 했다. 전혀 다른 재능, 사고방식, 가정환경을 가졌고 시대 배경조차 다른 사람들과. 나는 나를 낮추거나 깎아내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남들과 다른 성장 방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더 이상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내게는 상처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현실과 나의 현실은 엄연히 다르고, 또 내가 매일 만나는 세계는 날마다 새롭기에. 나는 또 다른 사람들을 닮으려, 소설가라면 으레 그렇게 하듯, 플롯을 잘 짜려고 했다. 내 현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현재 나는 기억 능력과 상상 능력에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게 언제까지 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 말을 잘 못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니었던가. 여하튼, 플롯을 치밀하게 짜는 일 말고도, 다른 방향이 분명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보지 못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처럼 묘사에 중점을 둔 소설, 헤르만 헤세의 『클링조어의 여름』처럼, 또 알프레드 되블린의 『무용수와 몸』처럼, 또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소설처럼. 그렇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난 무지하게 남들이 정답이라 외치는 것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한 문체에 있어서도 최고가 되려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남기려 했다.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쓰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세상엔 ‘열심히’로 안 되는 일이 있다. 말형 인간이 있든, 글형 인간이 있든, 나는 나만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둘 다 쓰지 못하든, 나는 나만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글쓰기에서도, 생활에서도,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이것이 나답게 되는 진정한 길이 아닐까. 재즈 힙합 그룹 중, ‘A Tribe Called Quest’라는 그룹이 있다. 그들의 노래는 빠르지 않다. 그들은 일정한 템포에서 다양한 플로우와 라임을 선보이고 그루브함을 뽐낸다. 그들의 음악은 여유이고 와이키키 섬에서의 휴가이다. 이전처럼 열정적으로, 열심히 글을 쓸 수는 없다. 나는 그들의 음악처럼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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