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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3

by 커피탄 리

호숫가의 한 남자

그 이후로 몇 주의 시간이 흘렀다. 학교로 올라가는 완만한 경사의 언덕은 만발한 벚꽃들이 돗자리를 폈고, 길을 따라 오르는 실개천 위로 벚꽃 잎이 한두 잎 정도 떨어졌다. 연인들은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보도를 연어처럼 거슬러 올랐고, 다른 연인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보도를 내려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핸드폰을 보면서 내려왔다. 벚꽃길은 학교 중앙에 있는 본관을 따라서 본관 옆에 있는 도서관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 호숫가까지 이어졌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을 싫어했다. 왜 싫어했는지 생각해 보자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싫어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것도 내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꾸미고, 떠들고, 욕하고, 몸을 키우고, 살을 빼는 것이 청춘의 본령일지도 모른다. 나는 태생적으로 그런 청춘의 습성을 싫어했다. 미감적으로도 싫어했다. 보다 자연스러운 게 좋았다. 꾸미지 않은 나무의 모양과 거친 나무의 외피가 좋았다. 초록색인 나뭇잎이 좋았다. 그것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것이 좋았다. 특히 멀리 있는 나무의 우듬지가 떨리는 날엔 내 가슴도 설레 왔다. 그런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은 여자가 좋았다. 그런 서늘 서늘한 윗옷을 입은 남자가 좋았다. 미적 기준이 고도로 집약된 공이 되어 터져서 온 세상으로 흩어진 케이스 같은 것은 싫었다. 그러나 난, 내가 만나는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말을 했고, 원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눈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옷을 입었고 행동을 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과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으로 설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나는 학교 쪽 호수로 가지 않았다. 사람들을 피해 학교 근처의 낮고 붉은 기와지붕들 아래로 다니는 것이 내 지난 산책 코스였다. 그날은 가보지 않은 길로 가보려 했다.
나는 학교 뒷산의 깊은 곳까지 갔다. 숲에서 들려오는 만 가지 종류의 새소리,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 숲 특유의 냄새는 내가 인간 세상을 벗어나 또 다른 곳에 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들려오는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와 촉감. 눈으로 보이는 나무의 질감과 나무껍질의 촉감, 또 거기서 묻어 나오는 흙. 나무껍질에서 묻어 나오는 차갑고 촉촉한 흙을 집게손으로 만지며 숲을 구태여 느끼려 했다. 그렇게 숲에 정신 팔려 한 시간쯤 보냈을까? 어느 호숫가에 와 있었다. 그런 곳에 호수가 있을 것이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찬찬히 호수의 둘레를 걸어보았다. 협곡에서 불어오는 얕은 바람이 호수 수면 위에 물결을 일으켰다. 물결에는 나뭇잎 한 장이 실려 있었다. 호수는 그리 크지 않았다. 호수를 두르고 있는 나무들은 온통 초록빛이었다. 호숫가 숲 속에 벤치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에 엷은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가서 앉아 숨을 정리했다. ‘나는 왜 여기까지 왔을까?’, ‘내 고민의 끝은 어디일까?’, ‘나는 언제부터 고통받은 걸까?’ 의문들이 나를 수십 개의 나뭇가지처럼 콕콕 찔러왔다. 그 의문들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전부터 호숫가를 배회하는 한 사내가 있었는데, 진녹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다가도 떨리는 수면에 시선을 두었다. 떨리는 수면은 내게 뭐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불분명했다. 찢어지고 부서진 게 내 내면이어서, 부드러운 물을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도 같다. 그러는 사이에 아까 그 사내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차렸어도 그를 투명인간 취급했을 것이다. 그가 조용히 떠나길 바랐다. 그런 생각으로 엉덩이를 의자 가 쪽으로 당긴 채, 다른 곳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그러나 그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의 말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의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도 갑작스러웠다. 그는, “너는 너를 사랑하니?”라고 내게 물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내 마음은 덜컥 내려앉았다. 그에게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니?” 그의 두 번째 질문이었다. 역시 대답할 수 없었다. “너는 네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알고 있니?” 세 번째 물음에 나는, “아저씨는 누군데 저한테 그런 말을 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를 쳐다봤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맑은 눈으로 환하게 웃으며, “내 눈에는 네가 그렇게 보이는구나.”하고 말했다. 사실, 그의 세 마디 말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그 말이야말로, 내게 필요한, 내게 있어서 결정적인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너는 존귀한 존재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울컥했다. 내 말은 정중한 투로 바뀌었다. “누구신데, 저를 이렇게 잘 아시는 거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내게 조언을 해준다면, 잘 풀리지 않는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해주리라고 생각했다. 사내가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아서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내가 내게 던진 질문들은 내 마음의 부서진 잔을 깨트리고, 그 위에 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그런 잔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포도주가 차올랐다. 이런 부류의 말을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살면서. 다시 말하지만 그 말들은 내게 꼭 필요한 말들이었다. 글쓰기에 관한 조언이 필요했던 것도, 다른 사람의 기대에 걸맞게 살았던 것도 다 일신의 성공과 안녕을 위한 것이었지 나 스스로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한 대로 내가 존귀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면, 어째서 그런 것인가. 또 왜 그의 몇 마디는 내 가슴을 뒤흔들어놓았는가. 난 적어도 내 성공, 내 욕심을 위해 나 자신을 혹사시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품을 수 있는 생각은 그 정도였다. 그는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졌음을 발견하고 다시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에는 환한 햇살이 들어왔고, 유리조각 같은 햇빛이 물결과 만나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호수 앞에 서 있었다. 내 손은 떨려왔다.

그 이후에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간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음을 발견했다. 내 몸도, 누더기가 된 마음도 헤아리지 못한 채 욕망과 영예를 위해 글을 써 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생활 습관이라거나, 생각하는 습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밤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 밤을 새워 쓰곤 했는데, 그것이 내 정신과 몸에 얼마나 해를 입히는지를 깨달았다. 생각하는 습관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몰아세우거나 나를 우울하게 하고 곤란하게 하는 생각들은 반복했지만, 나를 품어주고 편하게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또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에는 여전히 제대로 답할 수는 없지만, 이전하고 똑같이 살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은 남아 있다. 그 질문은 차차 생각해 나갈 것이다. 나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어느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공중의 새도 하늘 아버지께서 이처럼 아끼시는데…’ 맞다. 공중의 새도 아낌 받을 존재인데, 구름도, 바람도, 바다도, 산도, 나무도, 들도, 들의 꽃과 풀도 아낌 받을 존재인데, 생각하고 느끼는 인간인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 그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느라 남과 비교를 하게 되고, 그러면서 나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겼다. 그 생각과 행위야말로 무가치하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있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가치 있는 존재여서 일 것이다. 저마다 다른 생김새와 이름, 성격, 특성이 있는 이유 말이다. 이런 마음을 품게 되자, 나는 자연히 내가 가진 특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물론, 글도 쓰고 싶고 글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일단은 내게 남은 그림의 일을 마무리 짓기로 했었다. 졸업전시를 말이다. 그 일을 마무리하자, 내 괴로움의 절반 이상이 해결되었다. 이로써 난 또 하나 깨달았다. 어떤 일은 쟁취해서 얻어야 하지만, 어떤 일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는 것이라고. 그것이 비록 생각의 일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웃지 않게 되었다. 떠나갈 사람은 떠나가라는 마음으로, 난 내 감정에 보다 솔직해지겠다는 마음으로 나를 더 아껴주기로 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떠나가기는커녕, 이제야 솔직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나를 더 좋아해 주었다. 또, 졸업전시를 빼놓고는, 공모전도, 직업을 가지는 것도,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만족한다. 이전과 같이 쫓겨 살지 않게 되었다.
지금 나는 이 모든 일을 회상하며, 늦은 밤에 앉아 이에 관한 내용은 타이핑하고 있다. 이게 다 그 이상한 남자를 만나서 벌어진 일이다. 만났다 하기보단, 그가 나를 찾아왔다고 할까? 내가 원한 때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때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정체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 덕분에 지금 내가 더 웃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그를 만나게 된다면 묻고 싶긴 하다. 정말로 당신은 누구시냐고. 그리고 안겨들고 싶기도 하다. 그때, 나를 위해 그 호숫가에 나타나 줘서 정말 고맙다고. 내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만약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 호숫가에서 한 남자를 만난 이야기 말이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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