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에
세상에 초록이 다시 무성해질 때, 나는 오래된 원고들을 멀리하고 새로운 것들을 적으려 했다. 가난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것들을 더없이 가난했던 내 옛 시절 서랍 두 번째 칸 속에 넣어두었다. 다시는 보지 않을 요량으로 원고들을 정리했다. 그건 내 좋지 않은 습관이기도 했다. 지나간 것들을 다시 보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나를 다시 보지 않음으로써 일궈놓은 밭엔, 알알이 튼실한 벼들만이 자라나지 않았다. 또한 나를 다시 보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과거를 돌아본다는 의미에 지나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홀연히 길을 지나갈 때, 놓치게 되는 밤하늘의 종자 없는 별처럼, 나를, 혹은 무언가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다시 새로운 것을 적으려 하던 밤에는 무성해진 초록들 사이로 건조한 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급했다. 공모전에,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여러 번 떨어졌던 글쓰기를 반복했다. 떨어지고, 실패할수록 더 급해지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 것 같았다. 그날 밤, 하늘에는 별이 가뭄 때 강 물줄기처럼 말라붙었고, 내 창작의 샘도 말라붙어 뭘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쓴다는 행위 하나만으로만 나를 설득할 수 있었다. 머리를 있는 대로 쥐어짜 내어 쓴 글이라도, 내 실력을 향상해 주리라 믿었으니까. 수백 편의 시를 썼어도 만족할 수 없었다. 수십 편의 새로운 단편소설을 시작해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내 지난 몇 년의 성과인데, 마음에 드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제대로 완성한 것도 몇 되지 않았다. 차라리 창문을 열어 밤하늘을 유유히 산책하는 구름들을 보고 있는 편이 더 나았다. 내 것이 싫었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계속 쓰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리라는 계산이 서자 모든 것이 시들시들해졌다. 그러니까 하나 하더라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하고 그만두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전자의 이유 또한 확실했다. 좋아하는 글을 읽을 때도, 그 병적이고 습관적인 현상은 계속되었다. 새로 산 책도 금방 덮기가 일쑤였고, 가장 좋아하는 괴테의 책을 읽을 때는 더 병적이고 습관적이었다. 어느 순간, 친근하기만 했던 그 사람이 버거운 천재로 인식되어 꼴조차 보기 싫어졌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 나와 뭔가를 비교함으로써 생겨난 일이었다. 나는 이 같은 번 아웃 현상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도 그 뿌리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밤에 나는 글을 썼고, 글로 뭔가를 이루려 했으며, 직업을 구하기를 원했다.
푸른 하늘 아래에
하늘은 푸르렀다. 푸르른 하늘에는 화가가 잘못 칠한 자국 하나 없었고, 장식품인 구름마저도 휘황찬란했다. 빛을 머금고 고삐를 쥔 채 하늘을 경주하는 구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이날도 학교에 갔다. 대학 마지막 학년을 남겨두고 있는 나로서는, 마지막 학년의 가장 큰 과제인 졸업 전시를 잘 해결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순순히 그러지 않았다. 넓은 학교의 넓은 뜰을 산책했다. 그림에는 도무지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구해봤다. 내가 무엇에 집중하는 것이, 최종적으로는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 그들은, 더러는 모르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게는, '졸업 전시에 집중하고 글쓰기는 천천히 해라', '선택과 집중을 해라'라거나, '그림에 재능이 더 있는 것 같으니, 글은 취미로만 해라'라는 말을 했다. 그림에는 도저히 취미도 없고 열의도 없었다. 그런데 글쓰기를 취미로 하라니. 내 입장에선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하나같이 말하기 괴롭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는데, 진정 괴로운 건 나였다! 글을 잊고 살려고도 해 보았다. 문학책은 쳐다도 보지 않으려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해도, 나는 도서관에서는 문학 칸만 기웃거리고, 서점에서는 좋은 문학책을 찾으려고 두 시간을 덧없이 흘려보낸 적도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 일을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일찍 뭔가가 되려는 마음이 가득해서, 없는 돈을 털어 몇 권의 책을 사고, 책을 읽었다. -과연 그 마음뿐이 없는 것일까. 내 속에는?- 그럼에도 어딘지 허무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쓰고 또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남몰래 우울해했다. 창밖에서는 가는 비가 내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