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불가해한 것들의 연속
내겐 남아 있는 친구가 아무도 없었지만, 마음은 가벼웠고 대기는 상쾌했다.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든 글로 남겼으면 좋겠지만 이상하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영영 쓰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늘에는 실구름들이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나는 길가의 나무들에게 인사를 할 정도로 마음이 즐거웠다. 나무의 딱딱한 피부, 나무의 결, 결 사이로 기어 다니는 개미와 눈을 맞추며 길을 걸었다. 노란 햇빛은 인간이 걷기에 적당한 온도로 내렸고, 나뭇잎들은 서늘한 그늘을 던져주었다. 어떤 공터의 바위 위에 혼자 앉아 있는데, 현무암으로 된 바위를 보자 괴테가 떠올랐다. 그는 암석 관찰과 수집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생각하며 생각 속에 침잠할 때, 나무에 있던 흰 비둘기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둘기는 구름에까지 닿았다. 그 구름이 햇빛에 번쩍였다. 그러면서 하늘에서 한 음성이 들렸는데, 그 소리는 2000년 전 한 젊은 남자가 들었던 음성과 비슷한 것이었다. 내 몸에는 장대 위에 매달린 뱀을 보았을 때처럼 전율이 흘렀다. 마음은 맑고, 상쾌하고, 가볍고, 평온하고, 즐겁고, 기쁘고, 아름다웠다. 이런 감정은 전에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얀 비둘기는 내 안내자인 양 내 머리 위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소리를 내며 나를 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곳은 깊은 숲이었다. 하늘은 어두운 핏빛, 나무들은 검은빛이었다. 그 숲에선 이상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무를 잡고 숲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발가벗은 남녀들 수십 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은 채찍에 맞을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몸은 온통 피와 상처투성이였고, 손에는 수갑을 차고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의 줄 앞에서는 몸을 온통 검은 천으로 휘감은 남자가 그들을 인도했다. 그들은 감옥으로 인도되는 것이었을까? 나는 앞서가는 남자에게 그들의 정체와 그들이 갈 곳을 물어보았다. 그는, 그들이 ‘간음자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눈과 마음 그리고 몸에 죄를 지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감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들판으로 가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는 그 행렬을 따라가 보았다. 그 남자의 말대로 죄수들은 탁 트인 들판으로 인도되었다. 그는 수갑의 연결된 부분만 풀어주고 수갑은 채운 채로 풀 한 포기 없는 들판에 그들을 풀어주었다. 나무도, 짐승도, 곤충도 없는 벌판이었으므로, 쉴 곳도, 먹을 것도 없는 곳이었다. 죄수들은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또 그들의 신음 소리가 어찌나 절망적이던지, 듣고 있던 내가 다 괴로울 지경이었다. 나는 얼른 그곳에서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날 막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간음자의 벌판’을 벗어났다. 물론, 그들을 글로 묘사해야겠다는 생각이 일기도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기 때문이다.
벌판 옆에는 구릉이 많은 지대가 있었는데, 구릉 끝에 절벽이 있는 바다가 있었다. 그곳에는 수백, 아니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무슨 줄이지, 선물이라도 받는 줄인가 하고 가까이 다가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줄의 맨 앞에선 사람이 큰 소리로 바다에 자신의 속사정을 고해하고 바다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사람도, 그다음 사람도, 그들은 쉴 새 없이 바다로 뛰어들고 뛰어들었다. 줄에 서 있던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이곳을 ‘자살자의 언덕’이라고 했다. 바다에 한 번 뛰어든 사람은 영원히 건짐 받을 수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그 숲과 언덕은 다시는 쳐다도 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몸과 영혼이 피로해져 들판을 홀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내가 잘 아는 누군가를 닮은 한 사내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괴테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분위기는 묘하게 달랐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그와 함께 도시로 갔다. 도시에는 짧은 치마를 입은 피부 하얀 여자들이 많았다. 그는 가슴을 은근히 드러내놓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자들이 보일 때마다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이봐, 봐도 돼. 보는 것만은 죄가 아니라고. 남자가 여자한테 끌리는 건 자연스러운 본성이지. 암 그렇고 말고. 조물주께서 우릴 이렇게 만드셨는 걸?" 그럼 나도 그 말에 혹 해서 힐끔 하고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난 금세 지나가는 모든 여자들의 다리와 가슴을 쳐다보고 음흉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심한 자책감에 빠질 때면, 그는 없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혼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와 함께 '처다 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도시에서의 생활은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더 자극적인 무언가를 찾아 점차 우리는 술집에도 걸음하고 있었고, 최고로 말초적인 것들을 찾아 사창가에도 점차 들낙거렸다.
지난날 내가 ‘간음자의 벌판’에서 결심했던 것은 종잇조각, 아니 재가 되어 바람 속에 스며들었다. 어느 낮에 한 술집에서 질퍽하게 진탕 퍼마시고 있을 때, 창가에 흰 비둘기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술김이라서 흰 비둘기의 의미를 떠올리지도 못했고, 동료 중 하나가 소리치는 바람에 그 비둘기는 날아가 버렸다. 내가 퍼마시고 있을 때나 한창 즐기고 있을 때, 그는 없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극심한 괴로움과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꼭 그가 없을 때만 말이다. 내가 외로움에 빠져 거리를 떠돌고 있을 때, 그는 연기처럼 나타났다. 다음 행선지를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연기 같은 그 사내는 지시하는 방향으로 이동했고 그러고 나서는 홀연히 사라졌다. 어느 날 그는 나를 찾아와서, 어느 산 위로 올라가게 했는데, 온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이었다. 그곳에선 넓고 아득한 하늘을 빙빙 도는 웅장한 구름과 푸르고 붉은 산의 곡선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그리고 산맥 사이에 우뚝 솟은 도시가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나를 보고 아주 간사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앞에 보이는 풍경에 무릎을 꿇었다. 난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난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쳐 갔다. 나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내 욕망을 투영하며 살았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내 턱수염은 터부룩해지고, 내 머리는 희끗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간음자의 벌판’에 잡혀가지 않았다. 그렇게 수많은 간음을 저질렀음에도!
붉은 노을. 땅이 큰 소리를 내며 꺼져가기 시작했다. 노을은 불꽃처럼 하늘 꼭대기까지 치솟아 올랐고, 온 세상에는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산들이 무너지고, 새들이 단체로 숲을 떠나가는 둥 온 세상이 난리 속에 있었다. 그때 난 맨땅 위에 누워 있었다. 오늘의 그를 기다리며, 홀로 근심 없이 떠가는 구름 한 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세상이 무너지는 중에도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실 세상은 잠잠했다. 내 마음이, 내 육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내 마음과 영혼은 죄책감으로 상처 입고 두려움으로 전복당하고 있었다.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내 손에 수갑이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비틀걸음으로, 술에 쩐 채로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마을 어귀에 있는 율법 돌판도 만지작거렸다.(잠언 26장 11절) 난 그 위에 있는 먼지를 쓸어내렸다. 그때, 멀지 않은 바위 위에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를 힐끔 쳐다봤다. 그는 내가 잘 아는 한 얼굴과 닮았다. 홍안의 그 앳된 얼굴은 틀림없는 소년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부르지 못했다.
그날부터였다. 나는 나의 영혼의 주인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가 연기 속에서 그 무시무시한 형상을 드러내도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어두침침한 술집 계단도, 사창가로 통하는 음산한 동굴도 쳐다보지 않고 달렸다. 나는 울부짖었다. 그럼에도 내 손목의 수갑을 풀 수도 부술 수도 없었다. 나는 세상 끝까지 달아났다. 숲으로, 숲으로 갔다. 오솔길 끝에 빛의 터널이 보이는 숲으로 향했다. 그리로 가면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멀리, 산책을 하고 있는 한 노인이 보였다. 나는 지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보시오, 노인 양반.” 내 물음에 그가 쳐다봤다. 나는 그에게 내 수갑을 -마음의 수갑도- 풀 방법을 찾을 수 없겠느냐고 물어보며, 그간의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그는 자신을 시인인 루이지 영감이라고 소개하곤,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는, 수갑을 풀려하면, 일단 자기와 숲을 이백 번 정도 걸어야 한다고 했고, 또 그 후에 하늘을 보고 흰 비둘기를 찾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그가 원하는 만큼 숲을 돌았다.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 세상의 시작과 이 세상의 끝에 대해, 그 사이에 어떤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놋 뱀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들과 그것들이 얼마나 허망한 지에 대해. 그는 내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혀는 능란한 문필가의 손과 같았다. 그의 말을 들을 때, 내 마음은 옛 것을 떠올렸다. 수십 년 전, 젊은 괴테와 함께 숲길을 걸으며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또 그의 말에, 내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놋 뱀은 자네가 본 이후로 이 세상에 있지 않으니, 자네가 자유를 얻고 싶다면, 하얀 비둘기를 찾게, 그는 어디에나, 어디에나, 어디에나 있다네.” 그리고 그는 숲 속 깊은 곳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나는 하얀 비둘기를 찾아 나섰다. 몇 날이고 몇 달이고 하얀 비둘기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비둘기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분명, 루이지 영감은 그것이 어디에나 있다고 했는데, 나는 아무 곳에서도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무슨 영문 모를 일이란 말인가. 내가 반은 낙심한 채로, 반은 여전한 두려움에 젖은 채로 세상을 헤매고 있을 때,-그곳은 바위 협곡이었다-한 그림자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눈이 부셔서 고개를 들 수 없었는데, 귀에서 아주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젊은 괴테가 서 있었다. 나는 그가 '그'일까 봐 두려워했지만, 그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법 같은 손길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다시 우리가 처음 만났던, 만났던 것 같은 숲으로 왔다.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있었지만, 숲은 예전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숲은 큰 삼나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어느덧 밤이 되어 주위가 캄캄해졌다. 멀리서 불빛 같은 것이 보였다. 우리는 그리로 다가가 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흑발의 소년, 내가 처음 나선 길에서 만났던 소년이 있었다. 내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눈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콧물과 침을 줄줄 흘리면서 그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그 소년은 반딧불이 불빛 아래서 글을 쓰고 있었는데, 내가 다가오자 날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옆에는 눈보다 새하얀 비둘기가 잠들어 있었다.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니. 긴 세월이 흘렀어도 어린 나야, 너는 여전하구나.' 나는 그 비둘기를 품에 안고 별들이 쉬는 공터로 갔다. 그리고 숨결을 내쉬어 조용히 그 비둘기를 깨우고 그를 날려 보냈다. 그러자 내 수갑이 재처럼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내 방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원고지에 침까지 질질 흘리며, 몇 시간을 그렇게 쓰러져 있었다. 시간은 새벽 3시였다. 밖에서는 차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수갑이 있던 자리를 매만졌다. 나의 피부밖에는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소리가 들려 창밖을 봤다. 창밖에서는 눈보다 새하얀 비둘기 깃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책상에 있던 원고지를 정돈하고 오래 굳어 있었던 펜의 잉크를 흐르게 했다.
(完)
-괴테가 신전으로 가는 아이디어, 인물과 신전이 등장하는 장면은, 발터 베냐민의 책 《고독의 이야기들》에서 빌려왔습니다.
-'간음자의 벌판'과 '자살자의 언덕'의 아이디어는 단테의 《신곡》에서 빌려왔습니다.
-'느후스단'을 보고 두 돌판이 사라지는 장면, 그 전의 두 돌판을 들고 언덕을 오르는 아이디어는
의 아이디어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빌려왔습니다.
-두 돌판과 천둥 치는 산의 장면 역시,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