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불가해한 것들의 연속
검은 물결에 휩쓸려 생기 넘치는 별들은 사라지고, 달이 뿌린 은빛 조각만 남아 시냇물을 빛내고 있었다. 물결은 도도하고 낭랑하게 흐르고 흘러 저편 숲 속으로 사라지고, 다리에 닿는 풀숲에선 온갖 풀벌레들이 이상하고 신비로운 화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귀뚜리 소리에 맞춰 반딧불이들이 야광등을 켜고, 크고 어둑한 나무들은 스산한 바람에 휘청거리며 보는 이로 하여금 없던 두려움마저 집어 들게 했다. 바람은 서늘하고 밤하늘은 더없이 캄캄한데, 나는 이상한 빛에 이끌린 것이 아님에도 어딘지 숲으로 발걸음을 던졌다. 낮은 숲은 오솔길의 연속이었다. 하늘에 구름이 없고, 달빛이 계속해서 은빛을 뿌려주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금방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밤 요정의 축제를 기대했던 것일까? 나는 거대한 자석에 빨려들 듯 숲의 깊은 곳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낙엽 밟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축축한 나무 냄새 말고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분명 걷기 시작할 때는 힘이 넘쳤던 것 같은데, 나는 곧 아무런 힘도 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건 내가 정력 넘치게 글쓰기를 시작했던 처음 그 시절과 같았다. 그리고 더 이상 어떤 글쓰기의 형태도 지속할 수 없다고 느꼈던 어제와 같았다. 조금만 힘을 더 내어 걷기로 했다. 그 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쩌면 똑같은 곳을 계속 뱅뱅 돌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리에 힘이 붙어 걷는 데에는 지장이 없게 되었지만, 마음속에서 벌떼처럼 웽웽거리는 고통만은 여전했다. 이 고통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그리고 이 길 끝에 그에 대한 해답이 이정표처럼 서 있을까?
저 앞에서, 은은한 불빛이 보였다. 나는 ‘사람의 흔적인가 보다’하며 얼른 그리로 가 보았다. 그곳에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머리는 흑발이었고, 하얀 얼굴에는 앳된 티가 가득했다. 그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불빛 –반딧불이 불빛인 듯했다- 아래서 무언가 작업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듯해 보였다. 그는 나무 책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 주위에는 요정들과 정령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몰입하기도 했고 좀 떨어져서 자신이 쓴 만족스러운 작업물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의 낯빛에는 어두움이란 없었다. 아니, 표정은 대체로 슬퍼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아주 맑았고, 순수해 보였다. 그는 자신을 두르고 있는 생물들의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내 눈에는 아주 선히 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그의 작업물만 보였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그러나 내 눈에는 곧 피눈물이 맺혔다. 어디서 그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를 보았을 때 가슴에서 슬픔이 솟구쳤다. 분명히 아는 것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물든 나의 마음과 달리 그의 마음은 순수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눈물을 터트렸던 것이다. 나는 내 피와 오물로 물든 마음을 저주했다. 저주하면서 걸어갔다. 내 소리가 그에게 닿지 않게끔, 조심스레 주의하면서. 영혼이 교차하는 문 같은 것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 등불이 꺼지고 그가 어디론가 움직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계속되는 숲길의 연속이었다. 길을 가면 갈수록 숲의 경사는 높아지고, 나는 숨이 차오름을 느꼈다. 천둥이 쳤다. 천둥은 온 산과 계곡과 들을 부숴버릴 만한 목소리로 울어댔다. 그 소리에 겁을 덜컥 집어먹었다. 어느 정도 산을 올라왔을 때,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절벽 끝에 섰을 때, 내 온몸은 젖어 있었다. 비는 물비늘을 이루며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나무 하나를 껴안았다. 그때, 하늘에서 홀연한 빛이 비치더니, 한 남자가 내가 버티고 서 있는 절벽 위로 내려왔다. 그는 품에 두 돌판을 안고 있었다. 그 남자는 무턱대고 내게 그 무거워 보이는 두 돌판을 안겨주더니, 똑바로 걸어가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위엄에 눌려서 당장 몸을 틀어서 산을 올랐다. 돌판은 처음에는 속이 빈 듯한 판처럼 가벼웠는데,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무게가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나는 돌판을 품에서 놓지 못했다. 모세의 눈빛이 너무도 강렬하고 엄숙했던 탓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산을 올랐는지 모르겠다. 천둥은 계속해서 울었고, 천둥이 울 때마다 온 세상이 뒤흔들렸다. 세상은 수십억 개의 돌로 연결된 계단이 흔들리는 영상처럼 뒤흔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산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여전히 두 돌판의 무게 때문에 호흡이 어려웠다. 질식할 것만 같았다. 비를 하도 맞아서 몸에선 열이 나는 듯했다. 나는 동굴로 들어갔다. 똑바로 걸어가라는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몸에서 두려운 소리들이 나고 온몸이 진동했다. 공포와 오한이 내 몸을 뒤덮자, 내가 살아있는 것인지 살아있지 않은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상태로 비가 멎기까지 기다렸다.
비가 멎자, 동굴 안으로 햇빛이 속삭이듯이 스며들었다. 동굴 입구 쪽 천장에선 물이 떨어지고 있었고, 밖의 나무들은 햇빛에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돌판을 안은 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적한 숲길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한 남자가 숲에서부터 뛰쳐나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을 괴테라고 했다. 그 남자는, 아니 괴테는 선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구석구석 살피듯이 나를 쳐다봤다. 그의 높은 코와 잘생긴 입술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어린 사슴의 눈빛 같은 선망 가득한 눈동자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내게 동행이 되어달라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괴테는 나에게 이쪽으로 가면, 멋진 강과 들판이 나온다며 나를 그리로 이끌고 갔다. 우리는 한참을 이야기하며 걸어갔다. 히아신스, 장미, 라벤더 같은 꽃들과 눈인사를 하면서, 나는 그의 중저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세상에 관해 정말 멋진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또한 자연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보살피려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와 친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이미 나와 친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나를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강변으로 안내했다. 강변은 S자 곡선으로 급하게 휘어져 있었으며, 강 속에는 물고기와 곤충들도 살았지만, 하늘이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한 할아버지의 형상으로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는 눈썹도 푸르고, 수염도 푸르렀으며, 눈동자마저 그랬다. 백로도 강 위의 돌에 앉아 세월을 가늠하고 있었다. 멀리까지 뻗어 있는 들판은 또 어떤가. 들판은 녹색, 황색, 붉은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들풀들과 갈대들이 바람의 신호에 맞춰 이리로 저리로 몸을 기울였다. 멀리까지 뻗은 들판 끝엔 파란 산들이 있었는데, 그 어느 것보다 하늘과 가깝게 솟아 있는 산들을 보고 난 일종의 경외감마저 느꼈다. 괴테는 그 모든 풍경을 유심히 바라보며, 자기 안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품에서 필기구를 꺼내, 자기가 받은 느낌과 인상과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나는 두 돌판을 안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풍광들을 넋 놓고 바라봤다. 바라보기만 했다. 괴테는 내게 문학의 즐거움에 대해 알려주려 했다. 읽는 즐거움과 쓰는 즐거움에 대해. 특히 쓰는 즐거움에 대해, 반복적이지 않아도 되고 강박적이지 않아도 되는, 쓰는 그 자체의 즐거움과 호흡에 대해. 나도 그의 가르침을 따라서 산이나 숲길에서 본 것을 시로 써본다거나, 바위 위에 양피지를 올려두고서 수정해 보거나 했다. 그 과정은 내가 전에 혼자서 끙끙대던 글쓰기와 달랐다. 나는 약간은 자유로워졌다. 그와 함께 즐거워했다. 그와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계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꼭 인생의 많은 시간을 오래 같이 보낸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그는 산의 돌과 돌을 밟고 내가 볼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신전 같은 형상의 건물이 있었고, 건물들은 무지갯빛 운무에 가려져 있었다. 그곳에는 수백 층계의 돌계단이 있었고, 또 코린트식 기둥이 주랑을 채우고 있었다. 그 계단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수백, 수천. 아니, 수만에 달하는 부랑자 무리가 신전 계단을 가득 채우고 앉아 있었다. 나는 계단에 발을 올릴 수도 없었다. 그런데 괴테는 그 계단을 뚜벅뚜벅 올라가더니, 건물 중앙에 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는 문 안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 빛이 나는 금으로 된 자리에 앉았다. 온 세상이 그의 입성에 환호했고, 온 세상이 그의 이름을 찬양했다. 나는 머리가 혼란스러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두 돌판의 무게가 다시 체감되었다. 그리로 손을 뻗었으나, 그리로 닿을 수 없었고, 누구보다 그곳에 닿기를 바랐으나, 한 계단도 오를 수 없었다. 그는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월계관을 썼고, 그 영광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떠나 나만의 골짜기로 가야만 했다.
돌판은 원래 무게의 수십 배로 무거워진 것만 같았다. 내 몸에선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난 괴테와 보냈던 시간마저도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서러워하며 다시 돌판을 처음 들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공포와 오한과 불안과 지옥의 습기가 날 짓누르던 그때로. 한 마을 근처의 오솔길을 그렇게 걷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 마차에 탄 사람들은 날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들은 남의 불행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 같았다.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도 그렇게 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경박하고 가벼운 웃음들,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한담들이 내 귀뿐만 아니라 내 폐부를 찔러왔다. 난 괴로웠다. 은행나무들이 떨어지는 길을 지나갔다. 길 끝에 뭔가 아른거리는 형상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갔다. 장대가 서 있는 그 길 끝에 다다랐을 때, 탈진해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돌판을 껴안은 채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장대를 올려다봤다. 장대에는 뱀 모양의 조형이 휘감겨 있었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는데,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하늘이 떠나가라고 울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 품에 꼭 안겨있던 두 돌판이 재가 되어 바람에 떠내려간 것이었다. 소리들이 들려왔다. 냄새들이 났다. 나무 위의 새가 우짖는 소리. 강물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소리. 산모퉁이의 석양이 지는 소리. 해가 타오르는 냄새. 강물이 흘러가는 냄새. 새가 살아 숨 쉬는 냄새. 내 감각이 생생해지고 세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에서 눈물이 절로 흘렀다. 난 내가 돌판의 계율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시선을 장대 쪽으로 뒀는데, 장대 위에 휘감겨 있던 뱀이 사라진 것을 보았다. 놀랍고도 신비한 일이었다. 장대는 열십자 모양으로 석양빛 강바람에 스쳐지고 있었다.
<계속>
-괴테가 신전으로 가는 아이디어, 인물과 신전이 등장하는 장면은, 발터 베냐민의 책 《고독의 이야기들》에서 빌려왔습니다.
-'간음자의 벌판'과 '자살자의 언덕'의 아이디어는 단테의 《신곡》에서 빌려왔습니다.
-'느후스단'을 보고 두 돌판이 사라지는 장면의 아이디어, 그 전의 두 돌판을 들고 언덕을 오르는 아이디어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빌려왔습니다.
-두 돌판과 천둥치는 바위 산의 장면 역시,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