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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이었다. 꿈답게 분홍빛 연기가 흘렀고 내 정신은 어느 때보다 뚜렷했다. 별과 달의 모양은 모두 비뚤어져 있거나 일그러져 있었다. 볼을 꼬집어 보았지만 깨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한 가지 형상을 보았는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했다. 그 모양은 이랬다. 열십자 모양의 장대에 웬 뱀이 휘감겨 있었다. 윽, 뱀이라니, 나는 몹시 불쾌하고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체조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장대로부터 멀리 떨어지려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장대에서 내려온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뱀은 내 몸 위로 올라와서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 미끈한 표면이 내 몸을 지날 때, 소름이 돋았다. 뱀은 말 그대로 몸을 칭칭 휘감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뱀에 대항해서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서 죽는 건가’하고 온몸의 힘을 풀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뱀의 품 안에 완전히 안긴 모양새였는데, 뱀의 품은 너무나도 아늑하고 편안했다. 살면서 느껴본 감정 중 가장 평온한 느낌을 그때 받았다. 수천 개의 깃털 없이도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대로 바다를 건너 미지의 대륙으로 향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황홀한 감정에 휩싸인 채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구름에, 천둥이 칠 것처럼 빛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빛나는 지도에서 별안간 물고기 떼가 쏟아져 내렸고,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또 바다에서는 흰 비둘기 떼가 치솟아 하늘로 올라갔다. 나는 여전히 영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느 순간 뱀이 날 놓았는데, 나는 바다로 떨어져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침대 위였고 창밖에서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였다. 나는 대충 토스트를 먹고 집을 나섰다. 어둡고도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비는 멎었다. 하늘의 섬들처럼 흩어져 있는 구름들은 달빛을 머금어 밝았다. 꼭 어딘가에서 본 장면처럼 하늘에서 은빛 물고기 떼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 20분쯤 걸었을까. 캠퍼스 본관 쪽에 있는 공원을 지나고 있었는데, 거기서 뱀이 나왔는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한 사내가 발을 들어 올려 뱀의 머리를 밟았다. 뱀의 머리에선 구정물 같은 더러운 피가 터져 나왔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다 놀라서 뒷걸음을 쳤다. 나는 머리를 긁으며 강의실로 갔다가 수업을 다 듣고 빠져나왔다. 수업을 다 듣고 빠져나왔을 때는 본관 쪽 공원에 사람들이 없었다. 시내를 지나가는데, 시내는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들, 신호등에 매달려 있는 사내들, 백화점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 차도를 건너며 춤을 추는 여자들이 보였다. 공사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내 시선은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무리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달빛을 받으며 폭포 같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도 신이 나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1층, 2층… 13층, 14층… 한 층, 한 층 올라갈수록 내 가방에는 물건들이 생겨났다. 내가 가장 이루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 내가 가장 소유하고 싶었던 이성, 내가 가장 얻고 싶었던 쾌락을 주는 열매,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들. 이것들로 내 위를 채우면 내가 더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더 자유로워지고 평온해질 줄 알았는데. 채우면 채울수록 내 위는 더부룩해지고, 토할 것 같아지고,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고, 숨이 쉬어지지 않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눈을 떠보니 난 이미 28층까지 와 있었다. 탑에는 작은 창문이 나 있었는데, 떨어지기에 제격인 것 같았다. 더 이상 버티면 질식할 것 같아서 나는 창문 속 세계로 뛰어들기로 했다. 창문 속으로 머리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는 완전한 낭떠러지였고, 뭔가 쌓여 있었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자세히 보니 시체들이었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 벼랑 아래서부터 층을 이루어 왔던 것이다. 시체 썩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와서 코를 틀어막아야 했다. 나는 얼른 원래 있던 탑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숨 막힘이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탑을 올려다보니, 꼭대기까지는 까마득했다. 나는 더 이상 올라가지도 못할 것 같았고 그렇다고 떨어질 수도 없었다.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 탑은 무시무시한 진동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 시골에 와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