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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3

by 커피탄 리

아, 나는 어쩌면 영원한 떠돌이 재수생의 운명을 그때부터 펜던트처럼 품에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재수를 하는 동안, 나는 얼마나 떠돌아다녔는가. 품에는 괴테의 시집 같은 책을 끼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안 거리를 떠돌았다. 가슴에는 주희의 환영을 간직하고서, 잊히지 않는 그 환영을 거리와 골목 곳곳에 연기처럼 피워 보기도 하면서. 같이 입시를 하던 민지가 나와 가까워져보려고도 했다. 같이 학원 앞 골목에서 쉬는 시간마다 담배를 태웠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민지는 그저 한 살 어린 생기발랄한 동생이었다. 나는 죽어 있었고, 그건 외모나 마음에 비롯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영혼의 문제였다. 내 영혼은 떠돌이처럼 자기 자신을 둘 곳을 알지 못했다. 쉬는 시간이나, 식사시간마다 미로 같은 동네를 떠돌아다녔다. 어떤 때는 흐붓한 달빛 아래 누워 있는 산복 동네 아래를, 어떤 때는 석양을 맞고 서 있는 퉁퉁한 등대 옆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시간이 남으면 남는 대로 걸었다. 그리고 글을 써댔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호수 위의 아이>,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따위의 소설, 어디에선가 본 듯한, 여기저기의 글과 이미지를 짜깁기해 놓은 듯한 우스꽝스러운 글을 썼다. 그 글들은 A4용지 분량으로 100매가 훌쩍 넘어갔다. 퇴고의 의미도, 표절의 경계도 모르던 나는 그냥 글을 썼다. 인물도, 플롯도 모르고 감으로 글을 썼다. 그 글들은 내 방, 인쇄된 종이들을 보관하던 커다란 가죽 케이스에만 있지 않았다. 그 글들은 홍 선생님이라는 인물의 손에 전해졌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나와 가까이 지내던, 학원의 서울대 입사 반 선생님이었다. 그의 혀는 마법의 혀 같았다. 내가 반쯤만 알고 다는 모르고 있던 인문학 지식들을 아낌없이 도화지에 그려주는 마법의 혀였다. 수업 시간에도 물론이었거니와, 수업이 끝난 후 나와 나누던 2, 3시간의 대화에서 그의 혀는 꽃 주변을 맴도는 벌처럼 춤을 추었다. 앞서 말했던 대로 내 엉터리 글은 그의 손으로 이관되었다. 거기에는 <언덕 위에서>라는 이름의 시집이라 불리는 내 시 뭉치도 있었다. 그는 아주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이런 엉뚱한 시들은 처음 봤다는 평이 주류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 따르면 중에서도 좋은 시가 있었고 좋은 글이 있었다. 나는 거기에 희망을 두기로 했다. 아무튼, 그와의 대화는 내 기나긴 입시 가운데, 행복했던 순간에 속했다. 평소에는 마산과 창원을 오가며 수업을 들었다. 마산 학원 근처는 주희와 추억이 있어서 좋았는데, 창원 학원 근처는 시가지인 데다가 삭막한 데가 있어서 께름칙했다. 난 그림을 그렸고, 책을 읽었고, 민지와 함께 담배를 피웠다. 대화는 대게 피식피식 하는 한담. 내 반팔이, 긴팔로 바뀌고, 민무늬 옷이 체크무늬 남방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목에는 머플러를, 몸에는 털로 된 코트를 두르고, 매일 학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여전히, 난 오만해서, 수시를 두 군데밖에 넣지 않는 초강수를 두었다. 작년에 도전해 봤던 대학들은 쳐다보기도 싫었을뿐더러, 이번에는 서울대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지난해에 수능을 치지 못했던 것처럼, 그 해 서울대 시험을 칠 수가 없었고, 결국 내 선택지는 하나로 좁혀졌다. 아니면 1, 2월까지 정시를 준비해야 했다. 정시는 끔찍했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한 군데 남은 대학에 반드시 붙어야 했다. 그곳은 내게 2번째 선택지 그 이상은 아닌 곳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해본 적이 없었다. 기도 같은 걸 제대로 해본 일이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분인 줄로만 알았다. 그 겨울,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나는 떠돌이 놀이에 심취해 있는 스무 살짜리였다. 계속 언급했던 대로 걷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썼을 뿐이다. 심지어 걸으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미술을 하면서도, 메모하고 글을 썼을 뿐이었다. 그림은 제대로 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해 나는 대학에 붙으면 안 됐다. 겨울 어느 날, 붓을 내려놓고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확신 같은 것이 새싹처럼 내 딱딱한 마음 지면 위로 솟아올랐다. 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미소 지으며 다시 붓을 휘둘렀다. 이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수시 1차 때, 6번이었던 번호가 수시 3차 때 0번으로 줄어들었다. 대학에 붙었던 것이다. 11월에 온통 흙빛이 되어 시험장을 벗어났던 내가 생각났다. 기다리시는 부모님의 손길을 거절했던 내가 생각났다. 그러나 1월의 나는 웃고 있었다. 내가 경멸하던 입시 체제에서 성공한 것만으로도 활짝 미소 짓는 나는 참으로 어린 스물한 살이었다. 스물한 살이 되자마자, 나는 울진으로 향했다. 홍 선생님이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차에 태워 데리고 다녔다. 울진 바다는 정말 고요하고 신비로웠다. 그날은 어딘지 바람이 많이 불고, 파란 바다가 우리를 삼킬 듯이 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도 없는 해변가에는 갈매기들이 많이 모였고, 방풍림의 해송마저도 신비로워 보였다. 또 수평선이, 신기하게도 둥그스름했다. 이후 보았던 어떤 바다보다도 그날의 울진 바다는 아름다웠다. 둥그스름하고, 푸르스름한 겨울 수평선은 뒤로하고 우리는 어시장으로 향했다. 거기서 회와 찬거리를 잔뜩 사고서 울진 어딘가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거기서 밤새 예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 끝에, 아니 중간쯤에 그는 내게 이러저러한 경험을 많이 해 보라고 했다. 혼자 여행도 많이 다녀보고, 여행에서 여자도 만나보고 하는. 모든 예술이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말을 처음 내게 해줬던 사람은 그인 것 같다. 그러나 어쩐지 난 그의 모든 말들이 두렵게만 느껴졌다. 그날 밤, 우리는 술을 아주 많이 마시고 잠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해물칼국수를 먹고 헤어졌다. 터미널 앞에서 그는 내게, “이상한 글을 쓰긴 하지만, 넌 잘될 거야. 어떻게든 글을 쓸 거니까.”라는 격려를 해 주었다. 내 엉터리 글을 아는 이에게 들은 말이라 신뢰는 더욱 확실했다. 나는 기분 좋게 울진을 떠났다.
나는 그간 교회와 신앙에 반대되는 책들–인문학 자체의 본령이 그렇기도 하거니와-을 읽었다. 또 더 깊이는 날 저버린 부모, 내 새로운 동생과 그에게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본능적으로 문학을 택했다. 내 머릿속은 사회비판적이고, 반 성격적인, 그리스적인 생각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간절한 기도로 대학의 대문이 활짝 열린 후, 아니, 그 무렵부터 나는 성경이라는 것을 읽기 시작했다. 목사인 부모 밑에서 어려서 질리도록 읽고 들었던 책을, 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그 어느 단락도 이해하지 못했던 책을. 어느 겨울날 새벽, 나는 성경을 읽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유리창을 두들겼고, 청명한 달빛이 유리창 안까지 파고 들어왔다. 마치 내 마음에 파고드는 듯이 그 금빛은 그렇게 작용했다. 내가 읽고 있는 부분은 요한복음 13장이었다. 난 뭔가에 이끌리듯이 34절을 읽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반항하는 마음이었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누구도 날 사랑해 준 적이 없는데, 내가 뭘 본받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었다. 부모와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사랑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따지고 또 따졌다. 집에 사람들이 다 잠들어 있었으므로 큰 소리로 따지지는 못했다. 그저 내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심하게, 그러나 진지한 열의로 따져 들었다. 차가운 땀이 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나는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람이 부는 소리도. 모든 것이 다시 흥분해 있는 그때, 어떤 압력이 느껴졌다. 크고 부드러운 손 같은 것이 내 머리를 꽉 잡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손이 정말이지 세고 부드럽게 내 머리를 지압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서웠다. 무서워서 회개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때껏 지어왔던 크고 작은 죄악들이 생각났다.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자 그 손은 날 어루만졌다. 눈을 감았다. 천지에 번쩍번쩍하는 불빛이 보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생각이 바뀌어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있었다. 믿기지 않게도.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늘에선 때맞춰 진눈깨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제일 처음 떨어지는 진눈깨비를 삼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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