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화 Oct 13. 2018

외국생활이 남긴 것 - 우리는 정말 괜찮을까.

‘일상화가 되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퇴색된다.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권태로워 진다. 젊은 날의 권태는 꿈과 생기를 빼앗아가고 마음을 늙게 한다. 그럼에도 꽤 오랜 시간 침묵하고 있었던 이유는 니 나이에 그 정도는 모으고 입고 먹어야 되지 않느냐고, 부모님에게 좀 더 자랑스러운 자식이 돼야 하지 않느냐고, 지금 이대로 멈춰있는 편이 도전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지 않느냐는 말 때문이었다.’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일. 이미 익숙해져 있는 것에 거리를 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S는 자신의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기 위해 낯선 환경으로 떠나온 친구였다.  프라하에서 ‘낯설게 하기’라는 영상에세이를 매주 한 편씩 연재하는 S를 알게 된 건 지난 여름이었다. 비자 연장 후 일만하며 지낸 나에게 주는 포상과도 같은 여행에서였다. 베를린에서의 첫 1년과 비자연장 후의 일들을 묵묵히 듣고 있던 S는 조심스레 자신의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냈다. 


‘The Journey of your daily life’ 라는 이 프로젝트는 유럽이 더 이상 여행자기 아닌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일상을 조용히 관찰하며 스페셜하지 않은 평범한 것에서 위로를 받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가장 위로받는 때는 ‘쟤도 나랑 별반 다르지 않구나.’라는 비극의 보편성을 느낄 때라는 백영옥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동시에 S는 떠나오는 수고를 감당하면서까지 해외 생활을 지속하게 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나의 일상을 담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엔 나름의 힘든 시간을 버텨온 사람의 단단함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영상에 담길 모습이 걱정이 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나는 단번에 오케이 했고 한달 뒤 그녀는 약속대로 베를린에 왔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말을 버벅거리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탓에 제대로된 인터뷰는 진작부터 포기. 우리는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일상을 나누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기사를 작성하거나 티하우스에서 일을 하며 보내야했지만 S는 그런 내 옆에서 가만히 나의 모습을 담아주었다. 그러다 문득 ‘내 일상이 떠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박탈감을 주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선택 안에서 감당해야할 일들과 그것들을 지키기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뿐이지만 보여지는 모습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S는 햇살이 비추는 잔잔한 내 일상의 그늘진 뒷모습도 동시에 담아주었다. 몇 시간이고 서서 일하고 돌아와 퉁퉁 부은 두 발과 다친 손가락에 연고를 바르는 모습을, 집에 돌아와서도 또 다른 일을 끝내야만 하는 새벽을.  



프로젝트가 끝이 나고 우리의 일상도 제자리를 찾았지만 S와 나는 삶이 지겨운 순간마다 대화를 나누었다. 이 지긋지긋한 외국생활을 끝내고 싶으면서도 지속하는 이유들, 먹고살기 위한 성실함의 비극, 1유로의 찌질함,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 


S나 나나 이 곳에서의 경험들이 어디에 꼭 쓰일 거라는 생각이나 앞으로의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 더 단단해졌고 이제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정도가 전부였다.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치며 버텨왔던 우리지만 꼭 여행만 하는 삶이 행복한 삶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루지 못할 큰 꿈이나 나와 다른 인생에 대한 부러움보다는 내 안에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긴 외국생활로 배운 점이었다. 


1년간의 워킹홀리데이를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S의 영상에세이를 처음부터 돌려보았다. 프라하로 떠나던 1년 전의 S는 스스로에게 ‘거지가 되고 성과가 없이 돌아와도 괜찮냐.’고 묻고 있었다. 이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이었다. 우리는 정말 괜찮을까. 


S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는 파리로 작은 여행을 떠났었다. 퐁네프 다리 위에 멍하게 서있던 내 손을 잡아오며 S는 말했다. 


“언니 나는 우리가 참 대단하다? 조그만 동양인 여자애들이 자기 키만한 캐리어를 끌고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와서 행복해져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일자리도 구하고 또 이사를 몇 번이나 해낸다는 게. 난 그게 너무 기특해. 언니도 나도. 그치?”


나는 S의 손을 꼭 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리 건너편에는 캐리어를 든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