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눌렸던 욕구와 감정은 트리거를 만나면 폭발하곤 한다.
시드니에서 '속세의 맛'에 접속하자 한동안 식욕이 내려올 줄 몰랐던 것처럼.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한 영화를 만났다.
스크린을 바라보며 눈물과 콧물을 훔치던 내 모습을 보고,
무의식 아래 눌러 담았던 감정의 깊이를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배우 나오미 왓츠가 등장해 더 반가웠던 영화 <The Friend>.
이 영화는 ‘남겨진 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이자 교수였던 월터는 갑자기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친구이자 제자였던 아이리스,
그리고 마지막까지 곁을 지킨 개 아폴로-이 월터 없는 삶으로 밀려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그 개(남겨진 자들)는, 이후에 어떻게 됐을까?"
월터가 세상을 떠난 뒤, 아이리스는 말한다.
“I feel like I’m losing control. Like someone else is writing my story.”
내 인생이 통제력을 잃은 채 다른 사람의 손끝에서
엉망으로 쓰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느껴지는 무력감에서 비롯한다.
나는 그 말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의 나 또한 내 삶의 이야기에서 미끄러져 나오는 기분이었으니까.
남겨진 사람의 고통에 대해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The sharpness of the betrayal cut like a knife.”
“The pain for everyone left behind. And the dumb luck in it.”
죽음이라는 선택은
남겨진 자들에게는 칼날에 베인 듯 벼려진 배신이 되고,
그들은 그 고통 속에서도 살아 있는 ‘어리석은 운명’을 실감한다.
내 삶에서 증발해 버린 남편이 마치 죽어버린 것처럼 인식될 때가 있다.
그는 살아있지만 만날 수 없고, 한순간 내가 알던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며,
아직 치우지 못한 그의 책상 위 가족사진이 먼 꿈처럼 느껴진다.
영화에서 아이리스와 아폴로를 비롯해 월터를 사랑했던 이들은 상실을 통한 아픔을 공공연하게 애도하고, 위로받는다.
뺨에 닿은 바람의 찬기로 가을이 온 걸 문득 알게 되듯, 그때 깨달았다.
"나는 내 배우자를 잃은 상실을, 배신이 남긴 비수 같은 쓰라림을,
삶이 도둑맞은 듯한 공허함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하거나 위로받지 못했구나."
회사에서는 여전히 적극적이고 활기찬 동료로,
엄마 앞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한 딸로,
내 상황을 아는 친구들 앞에서도 밝은 친구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아직 이혼은 끝나지 않았고, 남편의 구속이라는 현실은 구설과 가십으로 소비되기 쉬운 소재다.
나는 침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침묵으로 내 감정은 더 깊이 응축되고 있었나 보다.
버려졌던 아폴로가 공원에서 운명처럼 만났던 월터.
느리게 깜빡이는 눈, 고요한 숨결.
늘 무언가를 기다리듯 웅크린 모습.
월터의 부재 이후 아폴로는 거의 엎드려 있었다.
그 개의 침잠을 보며
나는 따뜻한 시간을 그리워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머리로는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다정했던 순간을 지우지 못하는 나.
아무도 모르는 이 허기와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은근한 열망에
도무지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영화 후반부, 정신과 의사가 아이리스에게 묻는다.
“월터를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나요?”
그와 창살이 아닌 커피를 마주하고 앉는다면
나는 무슨 얘길 하고 싶을까.
무슨 말을 듣고 싶을까.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었냐'는 따짐과 호소는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 같다.
그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좋은 날도 있었고 그것까지 모두 부정하고 싶진 않다고.
각자 잘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듣고 싶은 얘기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렵다.
그 순간 내가 붙잡고 있던 현실이
다시 환상처럼 흔들릴까 봐.
환상 같은 진실, 진실 같았던 과거.
그 경계에서 흔들리는 나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 마지막 즈음, 아폴로는 마침내 공원에서 다른 개들과 뛰어놀기 시작한다.
해방된 몸짓, 눈빛에 어린 생기, 평온한 얼굴을 처음으로 보여준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알았다.
이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모양을 바꾸어 내 안에서 함께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나 역시 아폴로처럼
조용히, 그러나 묵묵히
나의 상실을 길들이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제 알겠다.
나는 그를 떠난 게 아니라, 오래된 나를 떠났다.
‘무조건적인 내 편’이 옆에 있던 시절의 나는
어느새 추억 속 인물이 되었고,
이제 나는 새로운 나로 고독을 천천히 숙성시키며 살아가야 한다.
고독의 드라이에이징.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다.
“Outside, life was chaotic and artless. And you took three punches to land one.”
삶은 엉망이고, 예술적이지 않다.
한 번 이기기 위해 세 번쯤 펀치를 맞아야 하는 것이 인생의 순리라면
나는 삼펀치를 한 번에 맞았으니 이제 이길 차례 아닌가.
아이리스가 아폴로를 쓰다듬으며 야수 같은 마음을 위로했던 것처럼,
나 또한 안쓰럽지만 꽤 괜찮은 나를 달래며
이 고독을 숙성시켜 볼 때이다.
겨울 찬바람 마음까지 한기가 시릴 때면,
고적한 드라이에이징이 끝나갈 때쯤
내 내면이 얼마나 성숙해질지 상상해 보자.
내가 제일 신나고 좋아했던 금요일,
스스로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