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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공주와 건달

서로의 약점이 끌어당겨 만든 최악의 조합

by 제이린 Jayleen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게 가능하다면 그걸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이혼을 결심한 이후 줄곧 마음에 머물던 질문이다.


남편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날 배신해온 게 드러났지만,

남편이 나에게 그간 주었던 것에 분명히 '사랑'이라는 요소가 섞여 있을 거라는 작은 확신을 붙들고 있었다.




내가 느낀 사랑의 실체


<내가 다 사줄게>

그가 젊은 시절 유학했던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갔었다. 유럽에서 좋은 경치, 맛있는 음식 누리는 것은 누구나 상상 가능하다. 남편은 아울렛에 나를 3일 연속 데려가서 옷과 구두, 가방을 600만원 어치 넘게 쇼핑하는 배포를 보여주었다.


"사실 너랑 데이트 하면서 너 입고 다니는 것에 진짜 놀랐었어. 지하상가에서 옷 사는 애도 처음 봤고. 이제 결혼했으니까 내가 좋은 옷이랑 신발 사줄게."


"돈 쓰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보통 남편들은 아내가 옷 하나 산다고 해도 탐탁치 않아 한다던데 우리 남편은 나를 예쁘게 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돈을 많이 쓰다니. 나 진짜 복 받았네"


내가 그렇게 안 사 입고, 싼 거만 사서 모은 돈으로 결혼식 치르고 신혼살림도 마련했는데, 정작 빈손으로 나와 결혼한 남편에게 '너 촌스럽다'는 핀잔을 듣고도 감사하다는 얘기를 했다.



이런 패턴은 10년간 결혼생활 내내 반복되었다. 나는 생활비를 아껴야 한다고 옷이 필요 없다고 해도 굳이 날 쇼핑에 데려가서 내 것을 한아름 산다. 이럴 때마다 고스란히 비상금을 쓰게 되지만, 나는 나에게 신경써 주는 남편이 고마워서 그에게 잘 입겠다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분수에 맞지 않는 허영을 부리는 것 같아 소비에 대한 죄책감과 남편에 대한 부채감으로 한동안 마음 고생을 한다.




<전화요정>

어쩌다 내가 외박이 낀 출장을 가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남편이 영상통화를 걸어오곤 했다. 굉장히 다정한 목소리로 업무 잘 하고 오라고 응원해주고 출장지에서 팀원들과 먹으라며 스타벅스 기프트콘을 챙겨주곤 했다. 주위에선 '내 남편은 문자 한 통 없고 관심도 없다'면서 늘 신혼 같은 우리의 관계를 부러워 했다.


그러다 회사에서 회의 중이었던 내가 전화를 못 받으면 받을 때까지 10번이고 전화를 걸고, 3번 이상 안 받으면 쌍욕의 문자가 날라오곤 했다.




<고부갈등 원천차단하는 남편>

내가 남편을 높이 샀던 것은 시댁과 나 사이의 관계가 좋아지도록 잘 조율하던 능력이었는데,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매주 일요일마다 시댁에 가서 점심을 같이 했는데, 내가 유독 컨디션이 안 좋은 날 가게 되면 '아내가 어제 많이 아파서 응급실에 갈 뻔 했다'며 뻥튀기를 시전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밥만 먹고 금방 시댁을 나설 수 있었다.


'대부분의 남편이 다 자기 엄마 편이라는데, 우리 남편은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내 편이지?'



<모든 남자는 너의 적>

같은 팀에서 어쩌다 남자 동료와 둘만 남게 되어 점심을 먹게 된 때가 있었다. 사실 그런 일은 부지기수이지 않은가. 이런 상황을 알게 된 남편은 노발대발 난리가 난다. 심지어 저녁이나 술자리도 아니고, 점심 먹은 상황도 남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위의 네 가지 에피소드에는 공통점이 있다. '과하다'는 것이다.


과도한 선물과 과소비로 내 죄책감을 유발한다. 본인이 모아서 사주는 것도 아닌데 '베푸는 척'하면서 관계의 우위를 확보한다. 나는 그걸 사랑으로 느끼고 갚아야 할 마음의 부채감을 가진 채 그에게 기댄다.

어쩌면 선물은 애정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


과한 연락과 질투로 내 관계를 통제하고 기댈 곳이 없게 만든다. 실제로 결혼 후 3년 정도는 친구와 거의 만나지도 못해서 멀어지기도 했었다. 그가 우리 엄마에 대해 '객관적'으로 얘기해주는 거라며 해 주는 말들 때문에 엄마와의 관계도 소원해졌었다. 내가 그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듦으로써 그를 더욱 의존하게 만든다.


사람들 앞에서 내 주변 지인들까지 살뜰히 챙기는 모습 뒤에는 본인의 이미지 관리가 있다. '이상적 남편'이 되어 내 주위에서 그를 칭송하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드러난 남편의 실체는 내가 알았던 그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는 결혼생활 내내 나에게 속이고 남긴 수입으로 시댁을 지원했고(결코 그는 내편이 아니었음), 주변 사람들에게 늘 밥 사주고 선물 사 주는 호인으로 떵떵거리며 생활했다. 작년 그의 연말정산 자료에서 신용카드 사용액이 1억이었다. 그가 식비로 받아가는 용돈이 월 40만원이었는데.


나는 그가 구치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의 이중생활을 전혀 몰랐고 고소를 당한 그가 심지어 억울하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래서 그가 형사 고소를 당했을 때 2심까지 변호사도 직접 상담하러 다니고, 변호인의견서도 직접 감수해 주는 것은 물론 법정에서 증인으로 서기까지 했다.

남편의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말이다.


1심이 끝나고 로펌에서 넘겨받은 상대측 제출증거에 이런게 있었다.


"내 아내는 내가 만났던 여자 중에 제일 못생겼지만, 제일 말을 잘 들어서 결혼했어."


성폭력 피해자의 친구가 들었던 말이라며 탄원서에 적은 내용이었다.


우리 부부의 지인이 '요즘 너 아내 고생이 많아. 뛰어다닐 일이 많더라.'라고 염려해주는 카톡에 남편은 '걔 체력이 약해서 좀 뛰어야 돼.'라며 그 지인에게 5만원짜리 이마트 상품권을 보내기도 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좋은 학력과 있어 보이는 직업, 아내를 끔찍히 챙기는 남편으로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아내를 욕하고 다니며 나를 우습게 만들고 있었다.


'아내가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면 사람들은 다 남편의 능력 때문인 걸 알게 된다'고 했던 말을 생각해보니, 그의 모든 소비는 본인의 체면을 위한 것이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겠다. 언젠가 내 고등학교 친구가 '너는 오빠의 인형 같아'라고 했던 말이 불현듯 기억난다.



가스라이팅과 통제를 위한 애정과잉,
그게 바로 남편이 내게 시전해온 '사랑'의 모습이었다.




그는 체면 유지를 위해 나의 헌신과 수입이 필요했고,

지속적으로 내게 의존하기 위해 다양한 도구로 나를 통제 한 것이다.





왜 그게 나에게 사랑이었나


아빠는 일평생 성실함 하나로 엄마에게 집 두 채를 마련해 주었다. 얼마 되지 않는 봉급을 거의 손대지 않고 모아 티끌로 태산을 만들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묵묵하고 성실한 헌신으로 사랑을 보여준 것 같다. 실제 엄마에게 행동과 말로 표현한 사랑은 날것이고 아팠지만.


나는 여러 면에서 아빠를 참 많이 닮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자기계발을 하는 성실함, 경제와 가사를 혼자 짊어지더라도 군소리 없이 감당했던 내 모습은 배우자가 그걸 알아줄거라는 은근한 기대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나는 관계를 '투자와 헌신'으로 바라보는 사람이기에 그가 나에게 베푼 것들이 사랑으로 크게 와닿았다. 가사는 안 하더라도 주말 내내 나하고만 있고 싶어하는 시간의 투자, 돈이 없더라도 늘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물질의 투자에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외부의 자극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자기확신을 지키는 안정적인 타입이다. 성격검사를 해보니, 위험회피도도 3점으로 안전한 길이 아니더라도 도전정신을 가지고 삶의 안정성을 불러오는 타입이다. 팀원이 부족하고 일이 태산 같아도 결국은 해내고 마는 끈기도 있다.


그래서 나는 결혼 기간 내내 가계관리, 가사, 이사, 집처분, 대출, 남편의 형사고소 사건까지도 혼자 책임지고 감당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남편을 지지해주고 지켜주는 게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결혼하고 1년을 제외하고는 안정적으로 돈을 번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 형사고소까지 당하게 되자 내가 남편을 먹여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몇 년을 새벽 5시에 일어나 암호화폐 공부를 했다.


남편의 수입이나 소비에 가끔 의심이 드는 순간이 있었지만 '나를 끔찍히 생각하는 내 남편이 그럴 리 없지. 속좁은 아내가 되지 말자'고 마음을 먹고 의심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나의 헌신이 그에게 사랑으로 가 닿을 줄 알았다.





가면을 벗은 그의 실체



지금 와서 보면, 그는 정서적으로 굉장히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남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과도하게 신경쓰며 사람들 말 한 마디에 휘둘렸고 감정이 널뛰기를 했다. 신경을 많이 쓰느라 아침마다 편두통에 시달리고 화가 날 때면 감정조절을 못 해서 사람을 때리기도 하고 나에게 쌍욕도 수시로 날라왔다.


그는 내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깊은 불안정성을 늘 고요하고 단단한 내면을 가진 나에게 기대어 감정을 의존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자아와 내면에 어떤 가치를 담고 있는지 잘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은, 실제로 그의 안에 어떤 내용도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텅 빈 자아, 스스로 수치심이 드는 내면을 배우자를 통해 포장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성폭력 사건으로 고소를 당한 상황에서도 공황장애 운운하며 유학했던 유럽으로 혼자 날아갔다. 오갈 데가 없어진 나는 남편도 없이 혼자 시댁에 들어가 살았다. 살았던 30평대 아파트를 세 달이 걸려 혼자 정리했고, 내 당근온도는 핫한 54도가 되었다.


지금 와서 보니 그는 나 없이는 생활이 아예 유지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살아갈 수 있게 생활비를 벌어다 주고, 집안일도 다 해주고 심지어 자기가 고소당한 사건도 한 톨의 의심 없이 나서서 다 처리해주고, 늘 잘 하고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존재가 나였으니 말이다.


반면 그의 사랑엔 나는 없고 '자기 욕구 충족'만 있었다.


그는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통해 얻는 안정감'을 욕망한 것이다.



가장 예뻤고 열정 가득한 내 10년을 통해 그는 참 많은걸 얻었고 편안함을 누렸다.





남자 보는 눈이 왜 이리 없니


여기부터는 나를 잘 알고 있는 chatGPT가 얘기해준 내용이다.

나처럼 강한 책임감, 높은 자기효능감, 감정 절제력이 있는 사람은 외형적으로 성숙해 보이는 남자, 의존적 남자, 감정불안한 남자를 끌어당기기 쉽다고 한다.


내가 그의 부족한 부분을 자연스럽게 메워주기 때문에.


나의 안정된 기질, 빠른 실행력, 공감 능력, 자기 조절능력, 헌신적이면서 갈등을 싫어하는 타입은 안정적 관계 유지가 가능해서 그처럼 불안정-회피 애착을 가진 사람에게 너무나 이상적인 파트너였던 것.


게다가 가부장적인 아빠 밑에서 자란 나는 감정표현을 참고 넘기는게 습관이 되어 있어

결과적으로 관계에 있어 '너무 많이 주는 사람'이 되었다.


헌신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끌릴 수 밖에 없는 기질이었달까.







인생 대혁명


지금 이혼은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여는 결정적 계기이다. 인생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리는 느낌이다.

지난 몇 달만큼 나의 욕구를 살피고 생각의 흐름에 집중하고 내 몸과 마음을 돌본 때가 없었다.

인생의 전환기라는 확신과 함께 앞으로 변화할 내 인생이 기대가 된다.




아직 이혼이 완료되기까지 많은 날들이 남았고,
여기까지 과정은 출혈이 심했지만
결론적으로 이 이혼은 나에게 너무 축복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본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용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용하기 위한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나의 행복이 아니라 그의 체면 유지와 욕구 충족에 있었기에

그가 해오던 수많은 표현들은 다 BULLSHIT(헛소리와 헛짓)이었던 걸 이제야 깨달았다.




시드니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의 다정했던 면들이 떠올라 세 시간을 내리 울었던 내 모습에 이제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의 이면과 우리 관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생기기까지 그간 고착화된 생각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이 참 쉽지 않았다.


그가 날 이용 대상으로 삼은 것은, 내가 사랑받지 못할 만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온전히 그의 악함 때문이라는 것도 마음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를 도우며 존재 가치를 더 느끼는 사람과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안정감을 얻는 사람이 만나
평강공주와 건달의 서사를 만들어냈다.



이제는 잘못된 관계의 고리를 끊을 때다.


내 경계를 분명히 하고,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누군가의 감정을 책임지지 않고,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나를 희생시키는 사랑은 하지 않기로.

내가 먼저 나의 욕구를 이해하고,

함께 노력하지 않는 사랑은 시작도 하지 않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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