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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동아리에 나타난 외계인

외계인 앞에서만, 얼굴 빨개지는 아이

by 고라니

권 씨를 향한 복수심*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사건 없이 흘러가는 고등학교 생활. 교외 독서 동아리 '한아솔'을 홍보하는 선배 언니들이 쉬는 시간에 불쑥 나타났다. 선배는 '한아솔'이 담고 있는 의미부터 말해주었다. '한'은 커다랗다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라고 했고, '솔'은 소나무를 가리킨다 했다. 선배 언니들의 인상도 서글서글하니 좋았고, 목소리도 또랑또랑하니 듣기 좋았다.


아쉽게도 한아솔에 흥미를 보이는 내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혼자 동아리에 가입할 자신은 없었다. 분명 그랬는데 모임 날짜가 되자, 망설임 없이 혼자 가방을 메고 버스에 올랐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알 수 없다. 무언가에 홀리 듯 겁도 없이 혼자 버스를 타고 한 번도 내려보지 않은 정류장에 내려서 덤덤하게 모임 장소로 걸어 들어갔다.


잔뜩 긴장해 있을 나를 웃으면서 다정하게 맞이해 주는 선배 언니. 오빠들. 동기들. 다행히 안면은 있던 같은 여고 다른 반 친구 세 명도 있었다. 하지만, 셋은 이미 친한 사이였다. 동아리에서 나는 차분하고 침착했다. 낯가림은 꽤 오래갔다. 하지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동아리에 나갔다.


2주에 한 번 주말에 모임을 했는데, 모둠 별로 준비한 책을 소개하고, 퀴즈를 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주로 세계문학이 다뤄졌다. 나는 읽지도 않은 책과 작가의 이름을 잘도 맞혔다. (찍기를 잘하는 편) 기억력이 좋지 않은 편인데 놀라운 일이었다. 퀴즈 시간에는 서슴없이 손을 들고 정답을 외쳤다.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

"나다니엘 호손, 주홍글씨!"

"어니스트 헤밍웨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퀴즈를 맞힌 후에 자꾸만 눈이 가는 친구가 있었다. 그런 얼굴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새하얀 피부. 너른 이마. 튀어나온 광대. 쌍꺼풀 있는 크고 찢어진 눈. 오똑한 코. 뾰족한 덧니. 이목구비의 조합이 뭔가 특이했다. 지구를 벗어난 얼굴.


후힛. 외계인 같다.

'디귿'을 마음속으로 외계인이라고 불렀다.


한아솔 모임이 있는 주말이 기다려졌다. 한 번은 모임이 끝나고 단체로 노래방에 갔다. 외계인은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나는 노래 시작부터 끝까지 울고 있었다. 이유 모를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다. 누가 볼까 눈물을 닦지 않고 그냥 흐르게 두었다. 다음 순서는 콧물이었지만, 다행히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외계인이 부른 노래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었다. 밋밋하던 내 삶이 요동쳤다. '기억의 습작'으로 '외계인의 습격'을 정통으로 맞은 나. 두두두두.... 두근대는 짝사랑 시대가 비로소 도래했다.


이젠 버틸 순 없다고 휑한 웃음으로

내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았지만

이젠 말할 수 있는 걸.

너의 슬픈 눈빛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걸.

나에게 말해봐.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 버린 내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전람회, 기억의 습작


전람회의 노래가 명곡은 맞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내가 엉엉 울 정도로 공감할 노래인지는 모르겠다. '기억의 습작'으로 '외계인의 습격'을 받은 뒤숭숭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습작을 시작했다. 잠들기 전에 외계인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나의 지구 일상을 털어놓았는데 마치 다른 별에 사는 외계인 친구에게 교신을 시도하는 듯도 했다. 수신인은 알지 못하는 설렘을 발신인 홀로 나날이 키워갔다. 처음부터 그에게 편지를 보낼 목적으로 쓴 게 아니었다. 부푼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해 뭐라도 해야 했고,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다. 모든 편지는 고백이었지만 보내지 못하고 고이 접어 간직했다. 서랍 가득 편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뿌듯하면서도 슬펐다. 동아리에서는 디귿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했다. 마음만 그의 주변을 맴돌 뿐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이 책이야. 장 자끄 상뻬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제목만 봐도 디귿 앞에 선 내 모습 같아서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이 책을 건네며 외계인에게 고백하겠어! (과연...) 나를 위해 종이 울릴 게 분명해.


낭만과 설렘이 가득했던 첫사랑과의 만남도 '책'이 주선해 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니 내가 어찌 감히 책을 손에서 놓겠는가.


권 씨를 향한 복수심*이 혹시라도 궁금하신 분은 여기로

https://brunch.co.kr/@paper-dream/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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