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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홍조와 재채기 심한 지구인

얼굴 빨개지는 아이_장 자끄 쌍뻬

by 고라니

장 자끄 상뻬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의 주인공 마르슬랭 까이유(붉은색 조약돌이라는 뜻)는 아무런 이유 없이 얼굴이 빨개진다. 그는 자신이 얼굴이 빨개지는 이유를 무척 궁금해한다.


마르슬랭은 '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이 어떻게, 언제, 그리고 왜 얼굴이 빨개지는지를 궁금하게 여길 뿐이었다.

-장자끄 쌍뻬, 얼굴 빨개지는 아이, 26p


얼굴 색깔에 대해 한 마디씩 하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진 마르슬랭은 조금씩 외톨이가 되어간다. 어느 날, 감기 기운이 없는데도 자꾸만 재채기를 하는 아이 르네 라토가 이사 온다. 둘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첫사랑 '디귿'은 얼굴도 빨개지지 않았고, 재채기도 하지 않았다. 보라색을 좋아하고 노래뿐 아니라 공부도 잘하는 (지구를 벗어난 외모까지 갖춘) 정말 멋진 외계인이었다. 나는 부끄럼이 많아 얼굴도 자주 빨개지고, 재채기도 잘하는 소심한 마음을 가진 지구인 '미음'이었다.


'미음'은 어른들이 집에 놀러라도 오면 방에서 꼼짝 않고 “안녕하세요.”를 몇 번씩 연습했다. 그러다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멀찍이서 손님을 향해 “안.. 녕.. 하.. 세.. 요.”라고 옹알댔다. 손님이 못 들으면 엄마가 손님에게 “딸이 인사하네요.”라고 대신 말해주었다. 모르는 사람뿐 아니라 아는 사람과도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 무서웠다. 엄마 말대로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도 빛없는 어두컴컴한 복도에 혼자 서 있는 듯했다.


소심한 지구인 '미음'과 멋진 외계인 '디귿'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미음'은 두 번째 서랍이 꽉 차도록 '디귿'에게 편지를 썼다. 빡빡한 고등학교 생활에 혼자 편지 쓰는 시간은 미음에게 소중했다. 비밀을 만드는 동시에 지키는 것이었다. 편지는 묘했다. 혼자 쓰는 것임에도 쓰는 순간에는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미음은 디귿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만큼은 얼굴 빨개지는 아이 마르슬랭과 재채기하는 르네와 말하지 않고 같이 있는 듯했다. 지루하지 않았다.


또 전혀 놀지 않고도, 전혀 말하지 않고도 같이 있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함께 있으면서 전혀 지루한 줄 몰랐기 때문이다.

-장자끄 쌍뻬, 얼굴 빨개지는 아이, 59p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된 르네. 마르슬랭에게 편지를 남겼지만, 편지는 온데간데없고... 그렇게 둘은 기약 없이 헤어진다. 늘 자신의 얼굴이 왜 빨개지는지 알지 못했던 마르슬랭이지만, 르네가 떠났다는 것을 알고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 얼굴이 빨개진다. 어른이 된 마르슬랭과 르네. 각자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틈에도 서로를 잊지 않고 있다.


어느덧, 나는 가끔 얼굴 빨개지고 가끔 재채기하던 소녀에서 하루의 80퍼센트는 안면홍조 그리고 농도 짙은 비염 때문에 수시로 재채기를 하는 중년이 되었다. 안면홍조는 40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시작됐다. 자율신경의 균형이 무너져서 안면홍조가 생겼다고 말했더니 둘도 없는 고등학교 단짝 친구 '니은'이 단언했다.

“갱년기. 노화.”

“아니야. 아직. 갱년기는. (최대한 전문성 갖춘 목소리로) 교감신경, 부교감신경의 불균형이 이명과 어지럼증. 안면홍조까지 유발한대. 안면홍조에 제기차기가 좋대.”

니은은 “그래. 그래.” 우쭈쭈 하는 느낌으로 웃는다. 니은은 고등학교 때, 만났다.


“매점 같이 갈래?”

니은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매점에서 여름엔 새콤달콤한 사과 쫄면을 먹고, 겨울엔 난로에 데운 김치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우정을 다져갔다. 나는 문과, 니은은 이과였지만 밥을 함께 먹었고 독서실에서도 늘 붙어 다녔다. 니은은 디귿에게 편지 쓸 펜을 고를 때도 함께해 주었다.


소년소녀가 얼굴 빨개지고 재채기하는 건 귀엽지만 중년이 그런 것은 좀... 볼품없다. (많이) 없어 보인다. 지금도 얼굴을 확인해 보니 예상대로 벌겋다. 이제는 안면홍조가 신경 쓰여 사람을 만나기 꺼려질 때도 많다. (그래도 니은은 만날 수 있다.)


수시로 터져 나오는 재채기도 문제다. 특히 밥 먹을 때 나오는 재채기가 가장 곤혹스럽다. 혼밥이 편하다. 밥 먹을 때 얼굴이 빨개지고, 재채기까지 나올 때가 허다하다. (니은에게는 민망하지 않다.) 다행히 재채기의 쓸모는 딱 한 명에게 있다. 찡얼대던 조카가 “훗추. 훗추” 나오는 재채기 소리를 듣더니 까르르 웃었다. 조카를 웃길 수만 있다면... 평생 재채기를 해도 괜찮겠다. 싶은 순간이었다. 훗추. 훗추. 하지만, 더 이상 소개팅은 불가하다.


우연찮게 디귿의 주소를 알아냈다. 소심한 지구인은 변신을 꾀했다. 서랍 안에 편지를 쟁여 두지 않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었다. 세금 고지서만 들어있던 우편함에 그의 편지가 들어와 있던 순간. 말도 못 할 기쁨.우편함 속 먼지까지 다 껴안을 정도로 우편함은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외계인과 지구인은 편지를 매개로 만나게 되었다. 그의 편지가 없으면 텅 비고 그의 편지가 있으면 꽉 찼다. '미음'의 마음은 우편함이 되었다. 온통 서랍의 마음이었다가 온통 우편함의 마음이 되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의 마르슐랭과 르네처럼 디귿과 미음은 전혀 말하지 않고도 같이 있을 수 있었다. 둘은 비밀 지키기에 아주 철저해서 동아리에서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블랙홀 같은 마력을 가진 외계인에게 끝도 없이 빠졌들었다. 그가 부르는 전람회의 '이방인'을 듣고 까뮈의 '이방인'을 사 읽을 정도로. 까뮈의 '이방인'은 외계인 추천도서나 마찬가지다. '이방인'의 첫 문장부터 빠져들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안면홍조와 재채기가 심한 지구인은 풋풋한 십 대에 읽었던 '이방인'을 40대에 다시 읽게 되겠지만, '그렇게까지' 불행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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