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만남
여름의 피부, 이현아, 푸른숲
사과가 한 알도 없었다. 이때다. 나가자.
사과와 방울토마토를 사러 가는 김에, 도서관에 들러보기로 했다.
신간코너에서 아무 정보 없이 발견한 책. 일단 제목에 끌렸다. 다른 계절에 피부라는 낱말을 붙여보았다. 봄의 피부, 가을의 피부, 겨울의 피부와는 다르게 여름의 피부에는 뭔가 있었다. 다른 계절의 피부는 표면을 건드린다면 여름의 피부는 내면으로 들어오는 감각이 생긴다.
침잠하면서 부유하는 듯한 눈 감고 웅크린 여자가 그려진 표지에 또 한 번 마음을 빼앗겼다. 글만 있는 빽빽한 책이 부담스러웠는데, 그림이 있어서 좋았다. 내 마음을 알고, 살펴주고 기다리고 있는 책처럼 느껴졌다. 작가의 말 첫 문장부터 이거다 싶게 확, 와닿았다.
"나는 늘 글을 쓰고 싶었다. 제대로 된 글을. 또 좋은 글을. 그러나 쓰고 싶은 글은 없었다."
책 장을 넘기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고, 지금은 봄이 한창인데... 계절을 건너는 느낌이 들었다. 책에 푹 빠져 있다가 도서관을 나섰다. 오랜만에 한 권만 빌렸다.
동천 벚꽃 구경을 간 엄마를 기다려서 같이 집에 가야 했다. 이모가 사는 아파트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자목련이 아직 피어있었다. 피어있다기보다, 보다만 책처럼 펼쳐져 있었다. 자줏빛 면과 흰 면. 발효된 술냄새가 났다. 깊이 오랫동안 들이마시면 취할 것 같았다. 해는 지고 있었고 조금 으슬으슬했다. 옷깃을 여미면서 '여름의 피부'를 꺼냈다.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이 자목련과 여름의 피부로 채워지고 있었다.
엄마가 나타났는데, "가길 잘했어. 벚꽃이 눈처럼 떨어진다"며 양팔을 크게 벌리며 벚나무 흉내를 냈다. 엄마는 몸을 움직이며 벚꽃을 한가득 쏟아 놓았다. 엄마가 걸을 때마다, 벚꽃이 흩날려 나를 스치는 것 같았다. 엄마 손을 잡았다. 우리는 간만에 씩씩하게 팔을 흔들며 걸었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는데, 저녁 얼른 먹고 여름의 피부를 얼른 읽어야지. 얼른. 하고 싶은 일. 오랜만이다. 마음이 콩콩콩 뛰었다. 여름의 피부를 읽다가, 잠드는 며칠이 이어졌다. 금세 여름이 올 것만 같았다.
이건 2023년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