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내면아이를 만나는 자기 치유 심리학
전화기 앞에서 마냥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이의 뒷모습. 어린 시절의 나를 회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 와서 같이 놀자고 말해주기만을 기다린다. 먼저 전화할 용기는 내지 못한다.
미술시간, 크레파스를 꺼내고 싶지 않다. 친구들은 24색, 나는 12색이다. 초라한 마음이 들어 미술시간이 싫다. 그리고 싶지 않다. 친구들보다 잘 그릴 리 없다.
친구들은 미술,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우리 집 형편에 학원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미술시간에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들은 대부분 미술학원을 다녔다. 부러웠다. 나도 용기 내서 미술학원에 가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보내주었다. 첫 수업 시간. "엄마 얼굴 그려보세요." 아이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쓱쓱쓱 엄마를 그려나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엄마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선 하나도 그리지 못했다. 텅 빈 도화지를 앞에 두고 식은땀이 났다. 다 내팽개치고 미술학원을 뛰쳐나왔다. 그 후, 미술학원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 밖에서 피아노 수업 중인 친구를 마냥 기다렸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안에 들어와서 기다려도 된다고 했다. 베토벤, 바흐, 모차르트 등 음악가의 이름이 붙어있는 문 닫힌 방. 피아노 소리가 들렸고 나는 감히 꿈도 못 꾸지 못할 새로운 세계 같았다. 다시 학원 밖으로 나가서 친구를 기다렸다.
집과 부모님을 감추어야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나 자신까지도. '너의 본모습을 알면 모두 도망갈 거야.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어. 너는 타인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해.'
엄마가 나와 동생을 버리고 떠날까 봐 무서워. 아빠는 엄마를 너무 괴롭혀. 내가 엄마라도 못 견디고 도망가고 싶을 것 같아. 학교 갔다가 집에 아무도 없으면, 엄마 옷이랑 구두부터 확인해. 엄마가 늦은 시간까지 집에 오지 않으면 나는 엄마 옷을 꺼내서 엄마 냄새를 맡으며 흐느껴 울며 노래를 불러. "엄마야. 어디 갔나. 엄마야. 어디 갔나." 엄마가 집에 돌아오면 나는 더 착한 딸이 되겠다고 결심했어.
마음속으로 나 자신에게 하는 말들은 대부분 질책이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혼내면서 성장했다. 학급 반친구들 사이에서는 명랑하고 밝고 유쾌한 아이였다. 타인의 반응과 표정에 민감했고 그들이 나로 인해 웃길 바랐다. 그들이 나를 원하고 좋아해 주길, 찾아주길 바랐다. 친하게 놀던 친구인대도 일 대 일 관계는 부담스럽고 잔뜩 긴장하기 일쑤였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맞은편에서 동네 친구가 걸어오면 뒤돌아 피하고 싶어졌다. 마주해서 인사를 나누는 게 몹시 불편했다.
학창 시절엔 내가 관계 맺는 방식이 별 문제없다고 여겼다. 진짜가 아니라 거짓으로 사는 느낌만 빼면. 느낌이었기 때문에 덮어두었다.
이성과 편안하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이 힘들었다. 처음 만나는 이성에게 매력을 어필하는 방법은 체득했지만,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 나를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사귀면 금방 나에게 싫증을 느끼고 버려질 거라는 잘못된 믿음에 빠져있었다. 이성과 함께 있기보다는 혼자 있고 싶었고 막상 혼자 있으면 외롭고 공허했다.
도대체 내가 어떻길래. 내가 그렇게까지 엉망진창인 걸까. 자신을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은 스스로를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고립시켰다. 그럼에도 내 진짜 속마음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문제 인식을 하지 못했고 그럴수록 타인에게 더욱 매달렸다. 물론 매달림도 상대에게 표현하지는 못했다. 어떤 자리에서든 주목받고 싶고, 뭘 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어서 안달했다. 그들이 날 좋아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모든 에너지를 타인에게 쏟았다. 혼란스러움. 복잡함. 마음은 늘 갈등상태였고, 말과 행동은 마음과 불일치되어 지치고 피로해졌다.
그렇게 나이 먹어 40대가 되었다. 그즈음부터 모르는 척 피하기만 했던 마음속 또 다른 내가 말 걸고 있음을 눈치챘다. 더 이상 덮어둘 수 없음을 알았다. 녀석은 몸과 마음이 탈진된 상태. 살아갈 에너지가 간당간당하게 남아 겨우 버티고 있었다. 많이 지쳐있음에도 한가닥 희망은 놓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비로소 외면했던 내면아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내면아이는 우리의 본능적 부분,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 우리의 내면아이는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감정, 기억, 경험을 포함한다.
-내 안의 어린아이, 22p
'내면아이'란 우리의 인격 중에서 가장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부분으로, 감정을 우선시하는 '직감적인' 본능을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태어났을 때의 본래 모습이자 핵심적인 자아, 타고난 인격인 셈이다. 이러한 내면아이에는 재능. 본능. 직감. 감정이 있다. 또한 내면아이를 우뇌에 비유할 수 있는데, 우뇌는 감정과 경험을 담당하는 창조적인 부분이다.
-내면아이의 상처 치유하기, 마거릿 폴, 소울메이트, 36p
내면어른이 자신을 보호하려고 내면아이의 감정과 욕구를 경험하고 책임지지 않기로 선택할 때 그 내면어른은 수치심, 무시, 방종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내면아이와 분리된다. 내면아이는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았다는 감정에 휩싸이고 내적으로 심한 외로움에 시달린다. 내면아이는 자신이 나쁘고 못됐으며, 사랑받을 자격도 없고 보잘것없고 부족한 존재라서 그런 거라고 결론 내린다. (...) 외적, 내적 분리로 내면아이는 강렬한 공포, 죄의식, 수치심과 함께 이 세상에 자기 혼자라는 감정과 내면의 외로움에 시달린다. 아이는 먼저 외부의 양육자들에게, 나중에는 자신의 내면어른에게 거부당하고 버림받고 통제당하는 두려움을 배운다. 결국 아이는 이러한 두려움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투사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도 거부당하고 버림받을 것이라고 믿거나 그들이 자기를 통제하려 든다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내 안의 어린아이, 23p
버림받은 내면아이는 항상 자신이 잘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자기가 잘못해서 거부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내면아이는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찾고자 아등바등 매달린다.
-내 안의 어린아이, 24p
'내 안의 어린아이'를 읽고 나서, 나의 내면아이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동안 너무 몰아붙였어. 내 요구대로 살아내느라 힘들었지?
좀 지친 거 같아.
네가 더 잘하길,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랐어. 다른 사람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했어.
아무것도 말할 게 없는 지금 내 모습에 실망했겠구나.
안쓰러워. 속상해.
지금이라도 말 걸어주니 좋아.
미안해. 너무 늦었어.
괜찮아. 항상 기다렸어. 이 순간을.
많이 외로웠지.
감정의 문이 닫혀버려서 외로움, 슬픔... 같은 감정을 잘 느끼지 못했어.
맞아. 외로움이나 슬픔을 느끼지 못하게 차단해 버렸어.
쓸모없고, 쓸데없는 감정 낭비라고 생각했거든.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보여야 했으니까.
겁났던 거지? 외로움이나 슬픔이 와르르 터져서 힘들까 봐. 사람들이 널 좋아하지 않을까 봐.
타인과 만날 때는 노력하지 않아도 원하는 밝은 모습의 가면이 바로 얼굴에 붙어버렸어.
어두운 내면을 들킬까 봐 많이 두려워했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늘 헛헛했어. 마음이 텅 빈 것처럼.
실수할까, 틀릴까. 늘 긴장하고 조마조마했어.
응. 그런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게 싫었거든.
널 너의 모습 그대로 좋아해 주고 지지해 주는 친구들이 있잖아.
맞아. 고마운 친구들이야.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도 친구들은 믿어 주었어.
나도 널 믿고 기다렸어. 이제껏 말할 기회가 없었지만.
너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어.
어떤 마음인지 안부를 물어주고, 그랬구나. 감정을 받아주면 마음이 편안해질 거야.
널 보살펴 아껴주고, 자주 웃게 해 줄게. 끝까지 지켜봐 주고 믿을래.
응. 나랑 재미있게 놀자.
좋아! 친하게 지내자.
지금 내가 외로운 것은 내 안의 어린아이가 외로워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그 아이는 어린 시절의 우리 자신이다. 가끔 누가 나를 그냥 좀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 때, 그것이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이다. 거부당하고 비난받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다. 상처로 남은 그 시절의 기억에 다시 고통받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내면아이를 모른 척한다. 혼자 남겨진 어린아이는 자기가 잘못해서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죄의식과 수치심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혼자 외로움에 떠는 어린아이가 만들어진다.
이 책은 불안, 공허, 외로움, 무기력 등 우리를 괴롭히는 부정적 감정, 가족 간의 불화, 관계 집착이나 중독이 바로 이렇게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내면아이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면아이를 만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 안의 아이가 진심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될 때, 그 아이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열정적이며 직관으로 빛나는 내면아이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는 본래 그렇게 경이로운 존재였다.
-내 안의 어린아이, 에리카 J. 초피크 & 마거릿 폴, 교양인, 앞날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