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5일. 오후 산책 겸 반납할 책을 가방에 넣고 나무길을 걸었다. 하루아침에 무참하게 잘려나간 방풍림들. 뭉뚱한 작대기로만 보이던 자리에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방풍림을 너머에는 기찻길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방풍림이 아름다웠다. 분수대에서 분사되어 뿜어져 나오는 물 모양으로 곡선을 그리며 자라난 관목들. 빛을 받아 더욱 신비로운 연두. 빛과 연두. 이상한 감흥이 솟구쳤고 '비밀'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았다. 본능적으로 '비밀'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꼭 쥐었다.
관목의 빛깔과 형상이 나에게 알 수 없는, 어떤 비밀을 펼쳐 보이는 듯했다. 나에게만 지금 이 순간 공개되는 비밀스러운 인상을 풍겼다.
무언가, 올 것 같았다.
비밀을 간직한 채로 걸었다. 걸음걸음 벅차올랐다. 버려지지 않았다는 안도와 기쁨. 순식간에 환해진 마음. 신기한 체험이었다. 여러 그루의 관목을 보았을 뿐인데... 사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중대하지도 않았다. 비밀의 공유. 그것만으로도 외로움이 가셨다. 설명하고 있지만, 설명하기 쉽지 않은 무엇이다.
도서관에 도착해 책을 반납했다. 가방이 싹 비워지니 다시 책을 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신간코너로 갔다. 더 고를 필요도 없이 '뒤라스'가 보였다. '뒤라스의 글쓰기'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나온 신간이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만나서 더 반가웠다.
뒤라스를 빌려 다시 걸었다. 여름 관목이 보여준 비밀은 뒤라스가 아니었을까. 걸으면 걸을수록 확실해졌다. 비밀은 뒤라스. 뒤라스에게 있었다. 나의 운명의 키. 무언가 하고 싶은데 무언지 모르는 잃어버린 욕망에 뒤라스를 채워 넣었다. 이번 여름에는 뒤라스에 있자. 뒤라스의 글들은 나에게 머물러야 하는 장소처럼 다가왔다. 그 장소에 나를 데리고 가고 놓아두면 꺼지지 않는 비밀이 생겨날 것 같았다.
무기력했던 삶의 판도가 확 바뀐다.
'뒤라스의 글쓰기'를 읽는데 심상치 않다. 이태껏의 나를 파괴하고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 주었으면... 읽다가 지치거나 지루해지지 않을까 겁도 난다. 하지만, 이번 여름은 뒤라스에 있자. 그렇게 가을을 맞이하겠다. 뒤라스와 함께 쓰겠다. 그녀의 글은 예언이며 나를 파괴할 전언이다. 이제 스프링 연습장을 과감히 접고, 여름 연습장을 슬쩍 펼칠 차례다.
*내가 앞으로 나간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한 것을 파괴한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처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의 언어가 되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어요. 혼자 있기 위해 그리고 사랑할 수 있기 위해 어떤 장소를 지켜야 해요. 왜 그런지. 또 누구인지. 어떻게, 얼마나 오랫동안인지 모르겠지만 사랑하기 위해서죠. (...) 모든 일이 갑자기 내게로 돌아와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안에 기다림의 장소. 사랑을 기다리는 장소, 아마 여전히 아무도 없는 사랑. 그러나 그것, 단지 그것, 사랑을 기다리기 위한 장소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시작하면 그것이, 글쓰기가 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씁니다... 감동적인 것은 그 이후, 그것이 당신의 삶을 따라 자리 잡을 때입니다....
*<뒤라스의 글쓰기>에서 옮겨온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