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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모를 이성 친구

속 깊은 이성 친구_장자끄 상뻬

by 고라니

'속 깊은 이성 친구'는 제목과 파란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디귿에게 선물한 책이다. 그에게 책을 건네며 (음흉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실제로 내밀지는 않았다.)


약속할래? 우리 서로에게 속 깊은 이성 친구가 되어주자. 절대, 얕으면, 안 돼. 깊고 깊어야 해.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선물할 용기.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읽고 쌍뻬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이 움텄기 때문이다. 막연히 짧은 이야기니, 읽기 수월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사랑'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디귿과 나의 관계를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 줄 거라 믿었다.


다시 읽어보니, 한 페이지도 안 되는 짤막한 이야기가 거듭 생각하게 만든다. 표면적으로 발화되는 말의 이면의 숨겨 둔 감정들. 진심과는 거리가 먼 타인을 의식한 말과 행동들. 존경 이면의 경쟁심. 속마음을 들킨 마냥 뜨끔뜨끔하다. '이성' 뿐 아니라 나 자신, 친구, 강아지 등 관계 맺고 있는 대상에 대한 감정과 말. 관계의 이면을 두루 담고 있다.


우리의 행복은 우주처럼 한이 없었다. 우리는 그 행복을 이야기하고 싶었고, 큰 소리로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알리지? 우리 친구들 가운데 그 행복의 깊이를 헤아릴 줄 알고 그것의 찬양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 우리는 그 행복을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으로 형상화해 보기로 했다. 나는 우리의 행복을 주제로 몇 쪽에 달하는 글을 썼다. 그녀는 그 글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에, 로르는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은 나를 완전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는 크나큰 의혹을 품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장 자끄 쌍뻬, <속 깊은 이성 친구>, 36p


디귿과의 연애에서 제일 후회되는 건, 잘 보이고 싶어서 안 보였다는 것이다. 상대를 향한 감정을 숨겼다. 한 톨도 꺼내 놓지 못했다. 디귿 이후의 연애도 비슷했다.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고 짝사랑이 시작된다. 나 자신만의 감정을 제멋대로 키운다. 감정이 터지기 직전 상대에게 고백을 하고, 사귀게 되면 가만히 있는다. 많이 좋아하는 마음을 보였다가는 상대가 나에게 질릴까 봐,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누른다. 감추는데 온 신경을 집중한다. 결국 흐지부지 되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끝나버린다. 연애 내내 불안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확인한다. 만남보다 되려 이별이 홀가분했다.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을 안 했다. 지독한 모순. 시간이 흐르면 점점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상대의 식은 감정을 마주하는 게 몹시 두려웠던 것 같다.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내가 나를 이해하기 힘든 한 장면이 있다. 디귿은 부대 근처 바닷가에서 주홍빛 조약돌을 주워 병에 담아 내게 선물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화난 사람처럼 돌을 던져버린 뒤, 병은 칼칼이 씻어서 설탕과 소금을 담아 양념통으로 썼다. 세상 낭만적인 선물이 양념통이 되었다.


그 시절의 나는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인 인간이었을까. 지금의 나라면, 그 돌을 주운 바다에 가보고 싶을 것 같은데. 그때의 나는 왜... 그랬을까. 이제와 길바닥의 돌은 왜 줍는 건지. 정말 희한하다. 나란 인간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


디귿과 어영부영 헤어진 후, 한참 만에 싸이월드에서 그를 찾아보았다. 달덩이 같이 환하게 웃고 있는 한복차림의 두 사람. 엄마야. 디귿이 결혼을 했다니. 내 인생 통틀어 가장 굵고 탄력 있는 눈물 방울이 파바방 떨어졌다.


못 잊어 한 없이 그리워했던 사람도 아니고, 문득 생각나 찾아본 것뿐인데 이렇게 까지 울 일인가. 사연 있는 절절한 이별을 한 것도 아닌데... 서럽도록 아이러니하다. 울면서도 우스운 건, 눈물이 시야를 가리는 와중에도 디귿보다는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


한복을 입었는데도 눈매 입매가 섹시했고, 볼륨감 넘치는 몸매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와는 정말 정반대 스타일이군. 그와 나는 잘 될 수 없었던 게 당연해.” 눈물이 뚝 멈췄다. 편협한 방식으로 싸이월드 창을 닫았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마음이 애초에 내게는 없었다. '그는 이럴 거야. 저럴 거야.' 내 멋대로 상대를 재단하고 판단했다. 심지어 누구보다 타인을 잘 파악하는 능력이 내게 있다는 우월감에 빠지기도 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왜곡된 시선과 마음.

왜 그랬을까. 통제 가능한 상황이 아니면, 불안했던 것 같다. 작위적으로 상대의 모습을 설정해서 나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비단, 연인에게만 해당하지 않았다. 나 자신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저만치에 이상적인 내 모습을 상정해 두고 그 모습에 부합하지 않으면 드글드글 괴롭혔다. 오랜 시간 굳어진 방식이라서 애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그렇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나와 타인만 남겨 놓고 싶었다. 결국, 수용하는 연애를 통해 배우지 못했고 나와 상대를 조금도 알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저 여자가 나를 경멸하듯 시도 때도 없이 수준 차이를 과시하고, 저렇게 온갖 멋이란 멋은 다 내고, 늘 따분해 하는 표정까지 짓고 있지만, 그래도 속마음은 다를지 몰라. 아직 말로 표현은 안 했지만, 혹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진실하고 소박하고 건전하게 살고 싶다는 갈망 때문에 저러는 것인지도 모르잖아?> 하고 나는 그녀를 바래다 주면서 생각했다.

그 생각이 나에게 다시 용기를 주었다.


장 자끄 쌍뻬, <속 깊은 이성 친구>, 22p


양 옆 테이블이 연인이다. 가운데 내가 있다. 다시 연애를 한다면... 솔직할 수 있을까. 편안할 수 있을까.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돌은 하찮았다. 속물 같지만 그랬다. 이제야 솔직하게 내 마음을 밝힌다. 디귿에게 돌이 아닌, 반지를 받고 싶었다. 누구나 보면 딱 알 수 있는. 끼고 다닐 수 있는 사랑의 징표가 필요했다.


디귿에게 받은 주홍 조약돌을 반지로 만들었다면... 멋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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