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동물원. 좁은 우리 안을 빠른 속도로 계속 뱅뱅 돌던 원숭이. "재미있는 원숭이네." 처음에는 원숭이의 독특한 행동이 신기해서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켜볼수록 원숭이의 고통이 전달되었다. '원숭이가 이곳을 많이 답답해하는구나. 아프구나.' 원숭이의 눈은 텅 비어 보였다. 더 이상 원숭이를 볼 수 없었고, 다른 동물들을 보는 것도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 '좀머 씨 이야기'를 읽는데 동물원에서 보았던 그 원숭이가 떠올랐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오래 걸을 수밖에 없는 좀머 씨.
좀머 씨 이야기의 화자인 '나'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스케치하듯 좀머 씨를 그려낸다. 아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시시콜콜 떠들 듯 경쾌하고 조목조목, 조잘조잘 독자에게 들려준다. '나'는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관찰하고 모험한다. 그 세계 안에 좀머 씨가 있다.
어른들에게 좀머 씨는 온갖 추측과 가십의 대상에 불과하다. 어른들은 좀머 씨에 관해 이야기하길 좋아할 뿐 그를 진심으로 보거나 듣지 않는다. 어른들에게 좀머 씨는 보이지 않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편견이나 억측을 더하지 않은 천진한 시선, 때 묻지 않은 눈으로 좀머 씨를 섬세하게 관찰한다. 오늘 어떤 표정인지. 어떤 옷을 입는지. 지팡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피부의 색은 계절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나'는 독자에게 묻는 듯하다. 당신은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오나요. 아니면 이러쿵저러쿵 그에 관해 떠들어대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나요.
피아노 수업에 늦은 '나'. 피아노 선생은 늦은 사정을 끝까지 말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멋대로 판단해 버린다. '나'는 억울한 마음에 자살을 시도하려고 가문비나무에 올라갔다가 숲길에 누워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는 좀머 씨를 보게 된다. 입에 구겨 넣듯 빵을 먹고 계속해서 쫓기는 사람처럼 주변을 살피는 좀머 씨를 보면서 그의 커다란 고통을 마주한다. 그리고 코딱지 같은 사소한 문제로 자살까지 생각했던 마음이 얼마나 우스운지 깨닫는다.
좀머 씨의 죽음을 '나'는 작은 섬이 될 때까지 끝까지 지켜본다. 그의 죽음을 방관한 것이 아니라 지켜준 것이다. 좀머 아저씨의 마지막 순간을 침묵으로 간직한다. 침묵은 말을 않기 위해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라 말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도의 한 방식으로 침묵한다. 침묵해야 할 때를 좀머 씨로부터 배운다. 침묵의 세계를 경험한다. 좀머 씨는 '나'에게 침묵이 된다.
좀머 아저씨가 자신과 한 프레임에 있었던 날들. 그리고 사라진 날들. 좀머. 독일어로 여름. 여름은 나무와 풀들이 무성해지고 무럭무럭 성장하는 계절이다. '나'도 여름 속에서 자란다. '나'는 자신이 좀머 아저씨를 묵묵히 지켜본 것처럼 그저 오래 지켜봐 달라고 당부하는 듯하다. 좀머 씨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스스로를 자라게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렇게 '나'의 세계는 깊어지고 넓어진다. '나'는 있는 그대로 좀머 씨를 본다.
작가는 한 존재.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순수하고 애정 어린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116p)
영화였으면 명대사로 꼽히고도 남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읽었을 때는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가 인상적이었는데, 다시 읽으니 '그러니'에 방점이 찍힌다. 그러니, 세 글자 안에 좀머 씨의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이 다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러니, 나도 좀 더 살아보자.
*'나'는 소설 '좀머 씨 이야기'의 화자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