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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밀 친구 좀머 씨

좀머 씨 이야기_파트리크 쥐스킨트

by 고라니

고등학교 시절,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친구들 생일에 종종 선물했다. "읽어 봤어? 너무 재밌지?" 기대에 차 물으면 친구들은 찝찝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좀머 씨가 죽잖아." 흔쾌히 재밌다는 반응을 보이는 친구는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친구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어딘가에는 좀머 씨의 진가를 알아줄 친구가 있을 거라 믿었다. 많은 날 고민 끝에 '디귿'에게도 좀머 씨 이야기를 선물했다. '디귿'은 교외 독서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였다.


"피아노 선생님 코딱지 장면 너무 웃겼어."

'디귿'은 밝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그렇지. 드디어, 찾아냈다. '디귿'을 향한 나의 마음은 더욱 굳건해졌다. 나의 첫사랑이자 비밀 친구였던 디귿. 동아리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경쾌하고 귀여운 스타일의 장자끄 상뻬의 그림이 있어서 '좀머 씨 이야기'가 더 좋았던 것은 맞다. 하지만, 좀머 씨는 독보적인 데가 있었다. 그는 어깨를 넘기는 호두나무 가지 지팡이와 빵 한쪽, 우비만 들어있는 배낭을 가지고 다니면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걸어 다닌다.


정작 그가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것인지? 그러한 끝없는 방랑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 열둘, 열넷 혹은 열여섯 시간까지 근방을 헤매고 다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p.22)


화자인 '나'는 호숫가, 경마장에서 돌아오는 길, 카롤리나와 약속이 어긋나 혼자 걷던 숲길에서 좀머 씨를 보게 된다. '나'에게는 유독 좀머 씨가 눈에 잘 띄고, 자신의 에피소드에 좀머 씨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코딱지 사건으로 피아노 선생님에게서 쫓겨나 비탄에 잠겨 자살을 결심한 '나'. 가문비나무에서 낭떠러지로 뛰어내리려는데 고통스러운 신음에 가까운 절망이 엉킨 참담한 소리를 내는 좀머 씨를 목격한다.


어떤 포악한 미행자가 있어서 그 사람과 아저씨가 떨어져 있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으며, 그 간격이 점점 좁혀지는 상황이어서 언제라도 그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나기라도 할 듯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사방을 자꾸 살피며 빵을 먹었다. 아니 먹었다기보다는 마구 구겨서 입 속으로 그것들을 밀어 넣었다. (p.93)


'나'는 고통스러워하는 좀머 씨를 지켜보면서 고작 코딱지 때문에 죽으려고 했던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깨닫게 된다. 결국 좀머 씨의 죽음도 '나'는 목격한다. 호수 안으로 들어가는 좀머 씨를 그저 지켜볼 뿐 무엇도 하지 않는다.


"저 멀리에서 가라앉고 있는 작은 섬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111P)


마을에서는 사라진 좀머 씨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하지만 '나'는 침묵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좀머 씨의 죽음에 대해 누구에게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철저하게 침묵을 지킨다. 빗속을 걸어갈 때 떨리는 입술과 간청하는 듯하던 아저씨의 말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116p)


저자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일체의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고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은둔처를 옮겨 다니면서 살아간다 한다. 2차 세계 대전 후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좀머 씨 이야기'가 쓰인 점을 고려하면 전쟁의 트라우마를 좀머 씨라는 인물에 투영한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다.


좀머 씨는 내 안의 비밀 친구다. 혼자 가방을 메고 걸을 때면, 좀머 씨가 생각나 좀 더 힘내서 걸을 수 있다. 지팡이는 없어도 가방을 메고 어딘가를 바삐 걷는 이를 볼 때면 '좀머 씨 같군.' 괜히 눈길이 가기도 한다. 좀머 씨의 행동을 분석해서 알아내기보다는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디귿'과는 연이 끝났지만, 좀머 씨와는 계속되고 있다. 좀머 씨는 내 눈에 붕실붕실 잘 떠오르는 사라지지 않는 매직아이다.



*좀머 sommer는 독일어로 <여름>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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