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 만남
용용이의 타임머신을 부러워하던 내게도 '퀸할리 호 타임머신'이 도착했다. 고등학교 1학년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리퀸 소설을 가방에 싸들고 다니던 아이들 주변에 앉게 되었다. 그녀들은 틈만 나면 손바닥 크기만 한 할리퀸을 펼쳤고 정말 빠른 속도로 뚝딱뚝딱 읽어냈다.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리퀸 세계 속에 온전히 빠져있었다. 나는 할리퀸에 별 관심 없었지만 첫 모의고사를 치르고 난 뒤 지대한 관심이 생겼다. 할리퀸을 읽는 아이들 모두 언어영역 점수가 훌륭했다.
“나도 읽어봐도 돼?”
신세계였다. 이렇게 환상적이고 가슴 쫄깃쫄깃한 세계를 이제야 접하다니. 헛살았군. 중학교 때, 단지 방 씨라는 이유로 '방구'라고 놀리는 코찔찔이 남자들을 두들겨 패주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내가 한없이 한심해졌다. 그때 할리퀸을 읽었다면 그들의 유치한 놀음 따위는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
늦게 시작한 만큼 쉬는 시간, 수업시간, 자율학습 시간 가리지 않고 할리퀸의 세계에 접속했다. 책 크기가 작아서 교과서를 펼친 뒤 그 안에 할리퀸을 숨겨놓고 읽기에도 딱이었다.
할리퀸 타임머신은 나를 섬으로 데려가 구릿빛 남자를 만나게 해주는 것에는 성공했다. 야자수가 널려있는 이국적인 배경과 낯선 짐승의 냄새를 풍기는 기고만장한 남자들. 거부할 수가 없었다. 따로 언어영역을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언어영역 성적도 올라주었다.
퀸할리 호의 순조로운 항해는 담임이었던 권씨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담임은 영어를 맡고 있었다. 영어시간, 퀸할리 호에 몰래 탑승 중이었던 나를 알아채고는 담임은 출석부로 머리를 인정사정없이 세게 내리쳤다.
“너는 반 분위기를 갉아먹는 송충이야.”
머리를 맞은 아픔보다 나를 송충이 취급한 것이 충격적이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무시무시하고 징그러운 벌레 송충이에 빗댄 것도 모자라 내가 반 분위기를 망쳤다고 모두에게 공표한 셈이니, 끔찍하게 비참해졌다. 얼마간, 반 친구들에게 괜스레 미안해졌고 수치심 때문이었는지 할리퀸은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내가 권씨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는 영어 포기였다.
그날 이후, 영어시간에 귀를 막았다. 영어까지 싫어하게 만든 권씨가 남긴 말. '송충이'는 학년이 올라가도 내내 상처로 남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권씨를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았다.
그렇게, 책 타임머신은 처참히 부서졌고 한동안 의기소침하게 지냈다. 그러다 학교 도서관에서 두 번째 책 타임머신의 문을 열어준 책을 만났다. 낯선 작가였지만, 단 번에 외워졌다. 진짜 독서가 시작되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
일단 책이 얇고 그림도 있는 게 좋았다. 읽기 쉬워 보였다. 작가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단순히 제목에 호기심이 생겨서 빼어 들었다. 학교 도서관 책장 앞에 서서 콘트라베이스 책장을 넘겼다. 자연스레 책 타임머신의 문은 열렸고, 콘트라베이스 연주가 들리는 오케스트라 공연 현장으로 망설임 없이 성큼 걸어 들어갔다.
권씨의 만행으로 퀸할리 호에서 강제 하선 당한 후, 영어는 포기했지만 다시 책 읽기를 시도한 일은 진심으로 칭찬하고 싶다. 훗날, 권씨와 함께 포기했던 영어를 되찾았다. 중학교 때 일기장을 보면 글쓰기, 운동, 영어는 앞으로 계속하고 싶은 일로 쓰여있다. 지금도 아주 느리게 영문판 '어린 왕자'를 따라 쓰고 해석하고 있다. 여름이 오면 소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펼친다. 아마도 올 여름에도 펼쳐보긴 할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영어를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을 것이다. 권씨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영향이 없지는 않다.
수업시간에 할리퀸 소설을 본 것은 분명 잘못한 일이고 혼날 수도 있다. 하지만 송충이는 당시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팩트 체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송충이는 반 분위기를 갉아먹는 게 아니라 솔잎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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