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책 타임머신 탄 용용이 부러워

by 고라니

어느 날부터 같은 반 용용이(가명) 방과 후에 우리 집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나중엔 아예 자기 집처럼 편하게 드나들었다. 처음엔, 나도 좀 머쓱했지만 용용의 방문이 거듭될수록 당연하게 여기며 작은 방 문을 열어줬다.


우리 집에서 계를 하던 날, 부모님들은 시끌벅적 노는데 용용은 책에 푹 빠져있었다. 용용이 빠져든 책은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과학 학습만화’였다. 전집이었고 두께도 꽤 두꺼웠다. 대머리 박사가 소년 소녀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과학 관련 지식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곗날, 용용은 엄마에게 책을 보러 와도 되는지 물었고 엄마는 언제든지 오라고 했단다. 물론 나는 모르는 일이었다. 용용이 꽤 여러 날 우리 집에 왔지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와 반갑게 인사 한 번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모르는 척하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용용에게 알 수 없는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용용의 성적이 오르면 속으로 좋아라 했고 멀리서도 용용 목소리가 들리면 소머즈처럼 귀가 절로 열렸다.


용용이 혹시 책을 핑계로 나를 보러 오는 건 아닐까.


녀석은 오로지 책에만 빠져 있었고, (야속하게도) 내게는 단 한 번 눈길도 주지 않았다. 녀석이 책을 읽으러 오기 전까지 나는 그 책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재미없는 책을 없는 돈 쪼개서 산 엄마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그의 방문 이후로 나에게도 뻐길 수 있는 물건이 있다는 게 나의 사기를 올려 주었다.


수차례 용용이 옆에서 책 읽기를 시도했지만, 읽는 척에 지나지 않았다. 붙었다 하면 KO패를 당하는 느낌. 녀석이 푹 빠져서 읽는 그 책에 흥미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용용이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에 빠져있다가 어둑해지면 갑자기 집! 이 생각난 듯 허둥지둥 돌아갔다.


책에 빠져있는 용용 모습에 끌렸다.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아주 흥미로운 모험을 하는 듯했다. 졸졸 따라가고 싶었다. 나도 미지의 세계를 갖고 싶었다. 녀석이 돌아가고 나면 나는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 열두 권의 책 중 단 한 권은 나에게 타임머신을 태워줄 것이라고 희망을 품으며 책장을 넘겼다. (야속하게도) 단 한 권도 없었다. 아니 단 한 장면이라도 있다면... 용용이와 책 이야기를 나눠볼 수도 있을 텐데... (야속하게도) 나에게는 단 한 장면도 허용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용용이 갑자기 발길을 끊었다. 청소시간에 녀석에게 슬쩍 다가가 지나가는 투로 물어보았다.

“우리 집에 언제 올 거야?

“이제 안 가. 책 다 읽었어. 너도 읽어봐. 진짜 재미있어.”


그를 유인할 다른 책이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학습만화를 끝으로 책을 사주지 않았다. 책과 담쌓고 살았던 두 살 아래 동생이 그 책에 빠져 읽는 모습을 보는데 괜히 심술이 났다.


왜 왜 왜 내게는 하나도 재미가 없는 거야.


책 타임머신 탑승 중이었던 용용은 몸은 우리 집에 있었지만 다른 시공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용용의 방문으로 나는 '책'을 타임머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용용 덕분에 책 타임머신을 간접체험했다. 이후 나만의 책 타임머신을 찾기 위해 이 책 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도 언젠가는 책 타임머신을 타고 용용처럼 나만의 모험을 멋지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하지만 책 타임머신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비로소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책 타임머신은 나타났다. 하지만 비극을 초래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글을 마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또다시, 그 과학 학습만화에 도전하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