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딸은 순한커플에게 '낱말 따라 쓰기'와 '시 필사' 숙제를 내주고 시낭독 모임에 갔다. 순한커플은 성실하므로 숙제는 당연히 해 놓을 줄 알았다. 모임 마치고 노트를 확인해 보니 숙제 아닌 페이지까지 몽땅 다 해놓았다. 똑순애에게 물어보니 급한덕이 다 하자고 해서 했단다. 급한덕은 무슨 일이든 미루는 법이 없다. 군말은 많지만 열심히 한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학교만 다녔다면 누구 못지않은 성실한 학생이었음은 분명하다. (1등으로 등교했을 듯) 급한덕 노트를 찬찬히 살펴보니 받침 빼먹은 단어, 한 줄이나 건너뛰고 안 쓴 문장도 있다. 성실하고도 급한덕.
시 필사하기 말고도 하나 더 하고 싶었던 것이 시 암송하기였다. 지금도 벅찬데 괜히 더 힘들게 하는 것일까 봐 망설이다가 까지껏 한 번 해보지 뭐. 하는 마음으로 강소천 시인의 '눈 내리는 밤'을 암송해 보기로 했다.
눈 내리는 밤 강소천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누나도 잠이 들고
엄마도 잠이 들고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나는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1연과 3연이 중 반복되니 해볼 만하다 싶었다. 예상과 달리 순한커플은 시 암송을 재미있어했다.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 못 외운다. 시를 암송하다가 둘은 웃음보가 터지기 일쑤였다. 오십 번 넘게 반복해서 읽었지만 암송은 실패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급한덕은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면서 똑순애를 열받게 하는 능력이 있다. 급한덕이 했던 말 또 하는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똑순애가 '눈 내리는 밤'의 일부를 인용해 급한덕의 입막음용으로 쓴다. '암송 실패한 시의 실생활 활용 편' 정도로 해두겠다.
급한덕 : 쏼라쏼라 쏼라쏼라... 잔소리 공격 개시!
똑순애 : (초연한 얼굴로)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이렇듯 시의 1연을 계속 반복하며 잔소리 공격을 시 암송으로 맞대응한다. "으휴, 지긋지긋한 또 잔소리 시작이다." 체념조로 하던 말을 눈 내리는 풍경을 고요히 바라보듯 그저 읊는다.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급한덕은 똑순애의 의도를 콩떡 같이 알아먹고 잔소리를 멈추고 피식 웃어버린다. 비록 시 전문 암송은 실패했지만, 잔소리 멈춤 작전 성공이다. 이처럼 시는 일부만으로도 쓰임이 있다. "시를 외워서 뭐해? 어디다 써?" 급한덕이 물으면 달리 할 말이 없었는데 잔소리 없는 생활에 아주 요긴하게 시가 쓰이고 있다.
무엇보다 서로 감정 상하지 않고, 슬기롭고 재미있게 상황을 바꾸는데 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매화가 피고 목련이 막 피기 시작했는데도 순한커플은 '눈 내리는 밤' 전문을 아직도 끝까지 못 외운다. 요괴딸이 낭송을 시작하면 따라 하다가 멈추면 그네들끼리 이어가질 못한다.
'나는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시의 마지막 연에다 대고 급한덕이 투덜댄다.
"나하고 이야기를 하기는 뭘 해. 어떻게 해. 말도 안 돼."
잠시 후
"음... 나는... 나는... 나는... 나는... 개 하고 이야기 하고 싶다."
이렇게 마지막 연을 바꾸어버린다. 똑순애와 요괴딸은 빵 웃는다. 급한덕도 덩달아 웃는다. 시의 힘이겠지. 시가 웃는 일상을 왕왕 물어다 준다.
며칠 후, 따로 연습을 한 것도 아닌데 똑순애는 완벽하게 '눈 내리는 밤'을 다 암송했고 급한덕은 마지막 두 연을 결국 이렇게 바꾸었다.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누나도 잠을 자고
엄마는 쑥 캐러 가고
말 없이
소리 없이
눈 내리는 밤
나는 개 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다음 암송 시는 어떻게 활용되고 변주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