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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 커피

by 고라니 Dec 24. 2024

  광양 서천이 보이는 구루커피. 바람이 쌩쌩 불어서 눈을 감다시피 뜨고 찾아왔다. 1층에는 다정하게 나란히 앉아 꽁냥꽁냥 중인 한 커플이 있다. 가방을 끈을 한 번 당겨 메고 2층으로 올라간다. 부러워서 못 본 척한다.  


  오전 11시까지 커피 한 잔을 마시면 한 잔을 더 준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11시. 두 잔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일단 받았다. 우연한 행운 같아서. 리뉴얼한 소금빵도 맛보라며 주신다. 이미 스콘 하나를 시켰는데, 소금빵까지. 행운 같아도 가뜩이나 옆구리와 등살이 오르고 있는데... 하지만 호사를 누리자 싶어 "감사합니다."  

  

  777 버스를 타고 이곳에 왔다. 아늑함. 빛이 가득 들어오고 창너머로 서천이 보이는 2층. 커피도 향긋하고 스콘도 바삭하다. 꾸덕한 스콘보다는 비스킷처럼 부서지는 스콘이 좋다. 흘리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딸기잼도 두 개로 넉넉하다.


  구름이 흘러가고 산과 마주한다. 구름이 잘도 훤히 보인다. 구름. 구루. 연이어 부르는 순간, 이곳이 단번에 좋아졌다.

  

  구루.

  구루는 인도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단어다. 오랜 시간 수행하는 스승을 인도에서 구루라고 불렀다. 거지와 다름없는 행색이라도 인도에서는 구루일 수 있다. 거지와 구루의 경계가 모호했다. 여행 친구 중 제이는 마날리에 머무는 동안 40분 여를 걸어서 매일 같이 구루를 찾아갔다. 구루는 늘 그 자리에 있다고 했다. 제이는 구루와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심오하고 철학적인 선문답을 기대하며 제이를 따라나섰다. 40분 여를 걸었을까. 제이를 보자마자 구루는 얼굴이 환해졌다. 별 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고 제이는 그 옆에 앉아 실실 웃었다. 자리를 뜰 때 구루에게 돈을 건넸다. 그러더니 숙소로 돌아가자는 게 아닌가. 기대가 무너졌다. 내 보기에 그는 거지였다. 제이에게마저 속은 기분.

  

  제이 왜 그에게 돈을 주는 거야?

  그를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며칠 보았는데 친구가 된 것 같아.  

  

  친구 같아서 돈을 건넨다? 나로서는 제이가 이해되지 않았다. 돈을 구걸하지도 않는 이에게 선뜻 돈을 건네다니... 하지만 나는 그날부터 제이가 좋아졌다. 다음날도 제이의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의 환한 웃음이 또 보고 싶어졌다. 그가 구루인지, 거지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마날리를 떠나기 전 날, 여행 친구들 모두 제이의 친구를 보러 갔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환히 웃으며 이어질 여행의 행운을 빌어주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의 시선이 유독 제이에게 오래 머무는 것을 보았다.

  

  마날리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이가 점을 기가 막히게 잘 본다는 소문을 듣고 재미 삼아 찾아갔다. 그는 취기 오른 마냥 눈이 벌갰고, 눈동자가 흐릿했다. 이도 갈변해 있었다.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는  내가 식스티에 결혼한다고 말했다. 식스티를 식스틴으로 잘못 알아들은 나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16살에 결혼한대. 함께 간 여행 친구들 표정이 굳는다. 아... 갑자기 웃음을 멈췄다. 16살 아니고 60살? 그때 내 나이가 27살이었으니 60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나이었다.

  

  60은 내게 오지 않을 멀고 먼 나이었다. 내가 60살에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망해하자, 구경하던 인도인 중 한 명이 이 마을에 진짜 구루가 있다며 볼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망설임 없이 그 길로 바로 그를 따라 구루를 만나러 갔다. (지금 생각하면 겁도 없이 무모했다.)

  

  어둑한 거실에서 구루를 기다려야 했다. 한참만에 모습을 드러낸 구루의 비주얼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인도인 중에 가장 뚱뚱하고 덩치가 컸다. 애드벌룬 마냥 부푼 몸. 눈이 돌아갔던 건 열 손가락 전부 두툼한 도무지 빠질 것 같지 않은 화려한 반지를 끼고 있었다. 점잖고 위엄 있는 구루의 모습을 기대했었는데... 내 기대는 엇나갔다. 내 눈앞의 구루는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개그맨이 웃기기로 작정하고 분장한 느낌이랄까. 그래서 구루를 친근감 있고 편안하게 대할 수 있었다. 나는 반지가 멋지다고 했다. 구루는 양손을 펼쳐 보이며 만족스레 웃었다.


  그는 나에게 빅 비즈니스 걸이라서 결혼보다는 다른 일들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낼 거라고 말했다. 빅 비즈니스 걸을 여러 번 강조했다. 비즈니스라니. 지금의 나를 보면 얼토당토않다. 5년 넘게 일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때, 결혼은 내게 아주 먼 단어임을 직감했다. 내가 돌아가려고 하자, 구루는 자신이 하는 일을 보겠느냐 권했다. 구루와 함께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얼굴에 시름이 가득한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구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울분을 토했다. 그러면 구루는 사람들이 충분히 울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가 그에게 물을 세차게 뿌리면서 마치 액운을 떨쳐주듯 노래인지 주문인지를 외쳤다. 일종의 정화의식 같았다. 구루에게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얼굴은 처음보다 가벼워졌고, 멈추지 않을 정도로 엉엉 울던 이가 심지어 평온해지는 장면도 보았다. 구루의 손짓은 단호했고, 위엄이 있었다. 정확하게 어떤 동작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기운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람들은 구루를 믿었고, 자신이 얽매인 힘듦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간절히 믿었다.


  아침에 세수만 해도 어제의 묵은 감정이 가벼워지거나 환기된다. 고민이 넘쳐나는 밤이면 이르게 잠자리에 들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린다. 찬물에 세수를 하면서 "어제를 벗는 거야." 주문처럼 되뇐다. 오늘 아침에도 그렇게 했다. 오늘은 새로운 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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