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14살 차이 나는 커플의 러브스토리, 결국은 헤어지는 이야기.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누나, 녹차밭 갈래? "
나는 또 한 번 못 이긴 척 함께 길을 나섰다.
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탔다.
창 밖이 도시에서 시골 풍경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한적한 터미널에 도착했다.
다시 지역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에서 내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다 보니 녹차밭이 보였다.
눈 쌓인 녹차밭은 아래서 올려다보니 커다란 트리의 한 부분 같았다.
눈이 내린 녹차밭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여기 미끄러지기 쉬우니까 손잡자."
Y가 얘기한다.
망설임도 잠시, Y가 덥석 내 손을 잡는다.
순간 찌릿한 전기가 내 몸을 관통하는 것 같다. 태연한 척, 뇌를 거치지 않은 말들이 막 나오기 시작한다.
우리는 대화가 잘 통했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비슷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많았고,
또 완전히 다른 부분도 많았다.
돌아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할머니들의 짐을 들어주고 넉살 좋게 대화를 나누는 Y를 보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쩜 넌, 어려운 게 없구나.. 난 무서운 거 투성이인데... 늘 주저하는데....'
집에 돌아온 나는 고민이 깊어졌다.
5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차이다.
군대는 다녀왔지만, 대학을 3년이나 더 다녀야 하는 Y다.
나는 곧 퇴직을 앞두고 어딘가로 떠나 20대의 마지막을 보내볼 생각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히자, 더 이상 생각하는 게 의미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래, 잠시 만나보지 뭐. 헤어지더라도, 지금을 살아보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20대의 끝자락을 지나던 나와 내 친구들은 만나면 늘 연애가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다. 친구의 연애. 모르는 사람의 연애. 연예인의 연애.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연애.
친구들한테 Y에 대해 얘기했더니, 엄청 놀란다.
한 친구는 막내 남동생이랑 나이가 같다며, 절대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친구가 묻는다.
"군대는 다녀왔어?"
"응. 다녀왔어.. 이제 막 제대하고 다음 학기 복학한대. "
"군대 다녀왔으면 남자지. 괜찮아. 한번 만나봐."
내 편을 들어준 친구의 이야기가 내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서로 끌리는 마음은 그 어느 것으로도 막아지지 않는다.
나이로도, 직업으로도, 지역으로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누나는 지금 날개를 다친 한 마리 새 같아, 내가 치료해주고 싶어. 상처가 다 나으면 그냥 날아가도 괜찮아."
그 해 겨울, 우리는 그렇게 연인이 되었고, 어학원에서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이 영어스터디를 했고, 함께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하며 많은 것을 공유했다.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상처를, 정말로 Y는 치료해주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도록 내 고민을 들어주고, 내 편을 들어주고, 날 응원해 줬다.
나 역시 그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내가 학생일 때는 몰랐지만, 직원으로 일하면서 알게 된 학생에게 제공되는 각종 프로그램을 알려주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3월이 되자, 나는 떠날 준비를 마치고, 호주행 비행기를 탔다.
내 마음은 설렘과 아쉬움, 두려움과 안도감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호주에서 새롭게 시작해 보자.. 우리가 인연이라면, 또 만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