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통틀어 가장 비현실적이었던 시기를 뽑으라면 나는 단연코 호주에서 지내던 시간을 뽑을 것이다.
30대를 목전에 두고, 20대 초중반 아이들과 10대처럼 보냈고, 어른의 무게에서 내려와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 시기가 없었다면, 나는 우물 안 개구리로 주변 눈치만을 살피며 우울하게 30대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호주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통장잔고가 바닥나자 여전히 겁 많고 소심했던 나는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호주의 마지막 일주일은 애들레이드에서 앨리스스프링스까지 가는 어드벤처투어를 했다. 영국과 미국, 독일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고, 트래킹을 하고, 별을 보며 잠들었다.
지구의 배꼽, 세상의 중심이라는 울루루 주변 트래킹을 하면서 호주에서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추억상자에 담고, 한국에 가면 해야 할 일들, 마주쳐야 할 시선들.. 그것에 당당해지기 위해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잘 될 거라고 나에게 얘기하고, 또 얘기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던 호주와는 반대로 한국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뜨겁지만 끈적이지 않다는 호주의 여름을 느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타 지역 캠퍼스에 있는 학과의 복수전공을 계획한 Y는 복학한 그 해에 4학년 전공까지 수강하느라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다.
나는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자격증을 따고, 토익시험도 보고, 입사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3년이 채 안 되는 대학 교직원 경력에 1년 가까운 공백.
경력으로 지원하기도 신입으로 지원하기도 애매한 경력이었다.
대기업이나, 중견 IT기업에 입사하고 싶었지만, 그 문턱은 생각보다 높았다.
서류전형에서부터 떨어지기를 부지기수.
어쩌다 서류전형에서 합격해 면접까지 보고 왔는데, 결국 떨어졌을 때의 실망감이란 눈앞의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치는 것처럼 허무하고 힘이 빠지는 일이었다.
내가 속상해할 때마다 Y는 나를 위로해 줬다.
"에이, 그 회사가 사람 보는 눈이 없네. 이런 인재를 몰라보다니, 그 회사 오래 못 가겠네. 자기를 알아봐 줄 곳이 분명히 있을 거야. 너무 속상해하지 마."
"그렇지? 에잇, OO 망해라!!!"
몇 번의 탈락의 고배 끝에 결국 나는 대학교 채용공고로 눈을 돌렸다.
역시 학교에서의 경력은 학교에서만 알아주나 보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대학교 채용공고가 올라오면 지원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서류전형에 대부분 합격했다.
"학교에서 보내주는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 프로그램, 둘 중 하나는 꼭 가봐."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제공해 주는 좋은 프로그램이 직원이 되고서야 눈에 들어왔다.
그 좋은 기회들을 다 놓친 것이 나는 못내 아쉬웠고 후회되었다.
Y는 내 말을 듣고 방학 때 진행되는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다행히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겨울방학이 되자, Y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캐다나로 떠났다.
나는 논술스터디와 면접스터디를 하고, 채용시험을 보느라 여러 지역을 다녔다.
인적성검사, 논술시험, 실기시험을 보기도 했고, 실무자 면접을 보기도 했다. 대학마다 각기 다른 여러 전형을 치렀다.
한 곳은 면접날짜가 중복되어 포기해야 했고, 총 네 곳의 대학교에서 최종면접을 치렀다.
부산에 면접을 보러 갔다가 나보다 몇 달 뒤에 귀국한 S도 만날 수 있었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함께 호주의 추억을 떠올렸다.
내심 합격을 기대하던 학교들마저 하나 둘 떨어지자, 불안한 마음에 벤처, 중소기업으로 다시 한번 눈을 돌리려던 그때, 서울의 한 대학에서 최종합격 통보가 왔다.
이 기쁜 소식을 듣는 순간 Y가 떠올랐다.
이 순간을 함께 해야 하는데, Y가 내 곁에 없다.
시차가 큰 캐나다에 있는 Y에게 합격소식을 이메일로 알렸다.
축하 답메일이 왔지만, Y의 빈자리에 아쉬움은 컸다.
얼마 뒤, Y가 귀국하기도 전에 3월 개학을 앞두고 나는 서울에 원룸을 구해 독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