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는 어려서부터 바다를 좋아했다.
경찰이셨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호남지역의 여러 곳을 다녔다.
그중에서도 가거도에서 살던 여섯, 일곱 살 즈음의 기억이 무척 좋았다고 했다.
그래서 전공도 해양환경이다. 군대도 해군에 자원입대해 다녀왔다.
Y가 복학하기 직전 국립대였던 우리의 모교는 다른 지방국립대를 흡수통합했다.
통합된 학교에는 해양경찰학과가 있었고, Y는 캐나다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수로 내려가 해양경찰학과 공부를 시작했다. 중간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Y는 계획대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전산팀이 아닌 입학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수시 입시가 시작되자 입학팀 근무는 쉽지 않았다.
야근과 새벽 출근이 많았고, 모두 함께 출근하고 모두 함께 퇴근하는 구시대적인 분위기가 나를 짓눌렀다. 심지어 입학전형본부라고 만들어 놓은 회의실에서 줄담배를 피워대는 상사들 때문에 내 몸과 마음은 날로 피폐해져 갔다.
지금이 과연 21세기가 맞는 걸까.
학교는 변화와는 동떨어진 조직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있었다.
여수까지 가는 KTX가 개통되기 전이었다.
Y는 서울까지 버스를 타고 오곤 했다.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하는 연상연하 커플이다.
결혼적령기의 나이에, 소위 말하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되니 주변에서 선자리가 하나씩 들어온다.
"서울시 공무원 7급에, 집도 있다는데 만나볼래?"
"사업하는 분 아들인데, 그 사업 물려받을 거래, 생각 있으면 연락 줘."
"ㅇㅇ전자 다니는 사람이야, 부모님 재력도 있고, 인물도 훤하던데, 만나봐."
엄마랑 친지분들한테서 연락이 온다.
남자친구가 있어도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사이에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한국은 그렇다. 나이도, 직업도, 학벌도, 지역도 중요하다. 우리 사이는 어느 것 하나 장애물이 아닌 것이 없었다.
"엄마가 만나보라고 했던 사람 만나봐."
"어떻게 그래.."
우리는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다.
"나 이제 안 올게.. 아프지 말고."
"... "
강남터미널까지 우리는 말없이 동행했다.
"나 갈게.."
돌아서는 Y의 등을 보는 순간 그를 붙잡았다.
나는 현실과 타협하려 했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가지 마."
그의 눈에서, 나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우리는 소리 없이 말없이 눈물을 삼키며 다시 손을 잡았다.
호주가 그리워졌다.
IT기술이민 검색을 해보니, 자격이 된다.
아직 서른 살이 안되었으니, 나이점수도 만점이다. IELTS점수만 따 놓으면 된다.
변할 것 같지 않는 학교에서도 떠날 수 있고, Y가 함께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의 장애물들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영주권을 받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만 같다.
정시 입시기간에 주말은 사치다.
월요일도 월요일, 금요일도 월요일.
토요일도 일요일도 모두 끝없는 월요일이다.
대외적으로 예민한 업무다 보니, 작은 실수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작은 글자, 숫자 하나하나에 집착하듯 매달린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
남쪽에 30년 가까이 살다 서울에서 맞은 첫 번째 겨울은 유난히 춥고, 또 매서웠다.
나의 스트레스 지수는 점점 더 높아져갔다.
이민준비자금 마련을 위해 당장 때려치울 수도 없다.
Y는 지방 기숙사에 지내며 남들 4년에 배울 주요 과목을 2년 안에 해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렇게 우린 둘 다 바쁜 세 번째 겨울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