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가 그 날 내게 전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누구보다 먼저 Y가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고 있었다.
Y와 통화 후 믿을 구석이 생긴 나는 언니와 동생에게 임신 사실을 말했고, 언니는 아빠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놀라 충격받을 것이 너무도 자명한 엄마에게는 천천히 말씀드리기로 했다.
"혹시, 남자쪽에서 반대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아빠가 도와줄테니, 아이를 지울 생각은 하지 마라."
아빠의 이 한마디가 내게 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늘 딸의 선택을 믿어주시던 부모님께 감사하면서 또 실망시켜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는 며칠을 더 기다렸다가 Y의 귀국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 엄마한테 이 사실을 조심스레 알렸고, 엄마는 예상대로 몹시 놀라 며칠을 앓아 누우셨다.
Y는 한국에 오자마자 그 해 결혼이 예정되어 있던, 큰 누나에게 연락을 했다.
"누나, 내가 먼저 결혼해도 돼?"
그리고, Y의 또 다른 누나는 꿈을 꾸었다.
"엄마, 나 정말 희한한 꿈을 꿨어. 우리집 베란다로 엄청 하얀 생쥐가 갑자기 확 들어와서 화들짝 놀랐어. 꿈이 너무 선명해."
"그거 태몽인데, 너 사고쳤니?"
"아냐! 혹시 언니 아닐까?"
부지런한 성격과 총명함을 타고난 아이를 상징한다는 흰 쥐 꿈이 우리 사이를 엮어준 첫째 아이의 태몽이었다.
드디어 Y가 항해를 마치고 왔다.
"우리 양가에 인사드리러 가자."
우리는 최대한 빨리 인사를 드리러 갔다.
나는 먼저 몸져 누워 있는 엄마를 나 혼자 만났다.
안방에 옛날 할머니들처럼 머리띠를 하고 누워계셨다.
"엄마, 미안해."
"니가 이럴 줄 몰랐다..아이고."
엄마는 실망하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먹고싶은 게 있냐고 물어보시며 임신한 딸의 입덧을 걱정하셨다.
Y가족을 만날 차례다.
부모님 및 누나들은 내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었고, 여자친구가 임신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가족들은 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나이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 것을 걱정한 Y는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지 않고 일단 만나보라고 했다.
두근두근..
드디어 Y집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안녕하세요."
가족들 모두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날 맞아주었다.
거실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임신중인 걸 다들 알고 있었기에, 몸은 괜찮은지, 회사는 어디 다니고 있는지 등 간단한 설문조사가 이루어졌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대망의 질문이 아버님으로부터 나왔다.
"띠가 어떻게 돼나?"
"말띠에요."
................
순간 정적이 흘렀다..
1초, 2초, 3초.......단 몇 초뿐이었을 그 시간이 마치 몇년처럼 느껴졌다.
"어, 나랑 같은 띠구나. 반갑다."
정적을 깨는 아버님의 한마디에 안도감이 훅 올라욌다.
가족들은 멀쩡히 회사 다니는 능력있는(능력있다고 여겨지는) 혼기 가득한 처자가 왜 다섯살이나 어린 대학생인 아들을 만났는지 궁금해했다.
다행히 가족들은 내가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나보다 어린 손위 시누이가 둘이나 되겠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 걱정보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Y는 우리집에 왔다.
이미 언니와 동생은 Y를 여러 번 봤던 터라 익숙한 상태였다.
언니와 동생은 미리 엄마와 아빠에게 Y의 듬직함과 사람됨을 얘기해 둔 터였다.
"이건 잘한 것은 아니야."
엄마는 나와 Y를 나무랐지만, 이 한마디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셨다.
비록 아직은 학생이지만, 분명 크게 될 사람이라고 나는 호언장담했다.
다행히 엄마도 아빠도 막상 Y를 만나고는 그의 서글서글함과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마음이 놓이신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