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추석이 지났지만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이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그 무더웠던 가을에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아직 졸업하지 않은 Y는 지방에 더 있어야 했고, 나는 서울에 있어야 했으니, 집과 혼수는 우선 생략하기로 했다.
수업을 길게 빠질 수 없었던 Y라 신혼여행도 가까운 국내로 가기로 했다.
많은 것이 생략된 결혼이라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나는 내게 와준 동백이도, 책임감 있는 Y도, 날 기쁘게 맞아준 시댁 가족들도, 사고 친 딸을 따뜻하게 감싸준 나의 가족들에게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무척 행복했다.
Y의 친구들이 웨딩카를 준비해 주었다.
잔뜩 튜닝된 Y친구의 아반떼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그 아반떼를 타고 목포항으로 갔다.
배를 타고 간 우리의 신혼여행지는 신안군에 있는 증도라는 섬이었다.
"우리 사이에 다툼이나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더라도,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늘 약속한 것은 지켜내는 Y였다.
비록 남들과 같은 화려하고, 멋들어진 신혼여행은 아니었어도 파도가 부딪치는 증도 바닷가에서 함께 보냈던 그때의 기억은 다른 어느 순간보다도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
우리는 결혼식 후에도 서류상 부부가 되었을 뿐, 함께 지내지는 못했다. 대학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던 Y는 졸업시험도 봐야 했고, 곧 태어날 동백이를 위해 항해사라는 꿈을 접고, 해양경찰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의 이민 준비는 결혼과 함께 중단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타국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앞으로 아이를 키우려면 가족들의 도움이 절실할 수밖에 없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임신 중에도 입시업무를 했다.
임산부는 야간근로를 할 수 없고,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야만 제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근로기준법이 있었음에도 어느 누구도 그 법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이 없었고, 내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 힘없는 막내직원이었던 나는 곧 아이를 낳아 키워야 했기에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입시라면 치를 떨게 되었고, 수당이 꽤나 짭짤한 주말 입시 감독도 절대로 하지 않는다.(애들 때문에 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긴 했지만.)
겨울방학이 되자, Y는 시어머니의 제안으로 내가 지내는 서울 작은 원룸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만삭에 가까워진 내 곁에서 나를 돌보라는 것이었지만, Y는 복잡한 서울을 힘겨워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마음이 많이 불편했었다고 한다. 그런 Y가 마음에 쓰여 나는 결국 Y를 먼저 시댁으로 보냈다.
예정일은 3월 초. 나는 입시가 막바지에 이르는 2월 중순까지 근무하고,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나는 친정에, Y는 친정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시댁에서 지내며 여전히 데이트하는 연인들처럼 만났다가 다시 헤어졌다.
Y의 졸업식 날이다.
나도 졸업식에 가고 싶었지만 예정일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복잡한 곳에 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해 가지 않기로 했다.
화장실에 갔는데, 무언가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들어 산부인과에 연락했더니, 내원하라고 한다.
병원에서 오늘 출산할 것 같다고 해서 갑자기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곧 아기를 만날 생각에 기대도 되고, 출산과정이 얼마나 힘들지 가늠도 할 수 없었기에 걱정도 되었다.
한참 졸업식 축하 속에 있을 Y에게는 점심까지 먹고 오라고 천천히 연락했다.
Y가 양복차림에 헐레벌떡 뛰어왔다.
연락을 받고 가족들과의 점심 식사를 하던 중에 온 것이었다.
진통이 극에 달하면 하늘이 노래진다고 하는데, 아직 하늘이 노래지지 않았기에 출산까지는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았다.
그 사이 시어머니도 오시고, Y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고 잠시 집에 갔다.
무통주사 때문이었는지 여전히 하늘은 파랗고 주기적인 산통은 견딜만했는데, 자궁문이 열렸다고 분만실로 옮겨야 했다. 나는 분만실로 들어갔고, 힘주기 직전 또 Y는 부리나케 뛰어와 가까스로 분만실에 도착했다.
"힘주세요.."
"한번 더.."
"힘 빼세요"
으잉? 벌써 나온 건가?
"응애응애!!!!!"
내 팔에 안긴 아기는 너무나 작았다.
이 작은 아기를 잘 키우고 싶다.
사랑으로 만들어진 우리 아이에게 넘치는 사랑을 주고 싶다.
우리 사이를 연결해 준 동백이는 이번에는 아빠의 졸업선물로 이 세상에 나와주었다.
양가의 첫 손주로 태어난 첫째 아이는 누구보다 큰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그렇게 우리는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