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엄마의 고군분투
내가 과연 잘 키우고 있을까?
5살 연하의 역마살 남자와 결혼한 나는 결혼과 거의 동시에 엄마라는 직책을 달고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임신 중에 배가 불러올수록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증상들이 나타났고, 그때마다 맘카페에 질문을 올리고 답을 찾으며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그리고 걱정 끝에 출산한 첫 아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출산한 나는 나의 출산능력에 심히 놀랐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육아도 곧 그 누구 못지않게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첫째 동백이는 정말 복덩이였다.
잘 울지 않고, 먹여주면 먹여주는 대로, 놀아주면 놀아주는 대로 크게 보채는 것 없이, 잘 먹고, 잘 놀고, 잘 쌌다. 100일이 되기도 전에 기적처럼 밤잠을 푹 자주었고, 120일에 뒤집기, 6개월에 혼자 앉기, 돌 지나자마자 걷기 등등 육아서의 표본처럼 크게 그 시기를 벗어나지 않으며 제때제때에 자기의 할 일을 척척 해내주는 아이였다. 그건 15살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양가의 첫 손주인지라 어딜 가나 관심의 대상이었고, 사랑을 듬뿍듬뿍 받았다.
첫째를 낳고 출산휴가 3개월에 육아휴직 4개월을 썼다.
당시 직원중에 육아휴직 전례가 없었지만, 입시가 시작되는 9월전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용기를 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1년을 낼걸 무척 후회되는 대목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의 배려를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과 바꿔버린 것이다.. 눈치를 보다가 나머지 8개월은 결국 써보지도 못하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약 6개월을 아이와 함께 할 수 있었고, 나는 친정집에서 아이와 함께 6개월을 보냈다.
아이를 키우는 게 처음인 나와, 손주와 산모를 돌보는 게 처음이었던 엄마.
우리는 그렇게 6개월간의 동거에 들어갔다.
역마살 남자는 여전히 고시원에서 공부 중이었다.
모르는 게 많은 나는 인터넷 카페에 질문을 했고, 삐뽀삐뽀 119를 찾아가며 육아의 답을 찾아갔다.
하지만, 답변속의 아이와 내 아이는 달랐고.
우연히 찾은 그 답들이 아이에게 정답일 때도 있었고, 완전히 답을 비켜가는 때도 있었다.
엄마는 또 엄마 나름대로 나를 포함한 아이 셋을 키웠던 기억을 끄집어내 엄마만의 답을 만들기도 했다.
30년이 지난 육아와 당연히 달랐기에 나랑 엄마는 작은 것에도 부딪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아이의 코막힘이었다.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 즈음되었을 때 태열로 얼굴과 몸에 바알 간 열꽃이 피던 때..
아이가 숨을 쉬는데 그렁그렁 소리가 났다. 코가 막히는 것 같았다. 맘카페에서 검색해 본 대로 생수를 코안에 살짝 넣어주니 재채기를 하면서 코딱지가 튀어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코에서 피가 살짝 났다.
큰일 났다 싶어서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엄마, 병원 가야 할거 같아. 코에서 피가 났잖아."
"아냐 괜찮아. 별일 아니야. 습도 잘 맞춰주고 시간 지나면 괜찮아."
"아냐, 가야 될 거 같아. 더 큰 문제면 어떡해."
"별일 아니라니까.. 이렇게 작은 거 하나하나 병원 가면 매일 병원 가게?"
"안 되겠어.. 나는 갔다 올래. 엄마 같이 가줘."
"아이고... 그러면서 크는거야."
나는 너무 걱정이 돼서 병원에 안 갈 수가 없었다. 왠지 그냥 두면 숨을 못 쉴 것만 같았다.
난 끝내 엄마를 설득해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다행히 별게 아니었고, 건조해서 그런 거라고 해서 습도에 더 신경을 썼다. 결국 엄마의 말이 맞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과 고민을 양산하는 일이었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여드름 같은 태열도 걱정이었고,
아토피가 되진 않을까, 먹다가 잠드는 것이 문제는 없는지,
대변을 보고 난 후에 다시 수유를 해야 하는지,
잠자는 시간은 적정한 건지, 키와 몸무게는 적당한지, 아이의 두뇌발달은 잘 되고 있는 건지...
머리를 한쪽으로만 돌리는 것 같은데,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머리모양이 이상해지면 어떡하지.
내가 과연 잘 키우고 있을까.?
그렇게 고민과 걱정을 하는 날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차츰 익숙해지고 적응되어 가고 있었는데, 복직할 시간 또한 점점 다가왔다.
복직하면 입시업무를 다시 해야 했고, 나 혼자 지내던 원룸에서 아이를 키우기도 어려웠고, 아이를 맡길 곳도 없었다.
나 혼자 아이를 감당하기에 아이는 너무 어렸고, 나도 어렸다. 결국 아이를 친정집에 두고 올라가기로 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많은 걸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엄마인 것도 알아주었으면 좋겠고...
아이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뭘 해줘야 할지.. 뭘 하고 놀아야 할지... 더더욱 고민이 되었다.
또 복직하기 전에... 습관도 잘 들여놓아서 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여러 가지로 복잡한 마음이었지만,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아이를 볼 때면, 그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곤 했다.
아이와 있는 동안만큼은 진심을 다해 돌보자 했던 그 마음.
그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아이는 내 목소리에, 내 노랫소리에 미소로, 옹알이로 반응해 주었다.
그리고 복직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