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이모가 이미 엄마 노릇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던 탓에 다행히 아이는 나와 잘 떨어졌고, 나 없이도 아이는 잘 지냈다.
"걱정하지 말고, 일 열심히 해. 오늘도 은솔이 잘 놀았어."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앞에서 아이가 나만 찾는다면 그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었을 것 같다.
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역마살 남자는 짧은 기간 공부하고 치렀던 첫 번째 시험에서 낙방하고 다시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우리 가정의 가장은 나인셈이다.
혼자 일하며 아이를 키울 자신은 없었다. 모든 게 처음이었으니, 두려움도 그만큼 컸다.
다행히 엄마는 아이 돌까지는 맡아주시겠다고 했고, 언니와 동생, 아빠 역시 아이를 무척 예뻐했으니, 나와 서울에 있는 것보다 다른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광주에 있는 편이 옳았다.
남편 역시 나 대신 가끔씩 아이를 보러 친정에 다녀오곤 했다. 친정식구들이 여의치 않을 때는 가까이 있는 시댁에서 아이를 돌봐주기도 했다. 아이는 낯가림도 없이 어딜 가나 잘 적응하고 잘 노는 순둥이였다.
복직한 이후 나는 다시 입시업무를 시작했다.
내심 다른 업무를 하지 않을까 예상을 했으나, 그 예상은 가차 없이 깨진 상태였다.
"딸깍"
불 꺼진 집에 불을 켜고 들어가면 냉기가 느껴졌다.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고 좋아하던 내 원룸이 어느 순간 외딴섬이 되어 있었다.
싸늘하고 적막한 집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이가 생각났다. 매일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오늘은 별일 없었어?"
"응. 은솔이 잘 지냈어. 오늘 아빠 일 보러 가시는데 데리고 갔거든, 사람들이 얼마나 이쁘다고 하는지..."
아이와 함께 보낸 부모님 모습이 그려졌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어린 손녀딸 데리고 다니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란 걸 안다. 그래도 엄마아빠는 어디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아이를 곧잘 데리고 다니며 여기저기 구경을 많이 시켜주셨다.
부모님과 아이 사이에 나도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본다.
아쉬움과 죄책감 사이 복잡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한주를 보냈다.
금요일 저녁 퇴근이 늦어져도 어떻게든 광주에 갔다.
아이를 보러 가는 그 길은 늘 나를 설레게 했다.
"은솔아, 잘 있었어? 엄마 보고 싶었어? 엄마는 은솔이 엄청 보고 싶었어."
내가 집에 들어서면 아이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었고, 옹알이를 시작한 아이는 내게 그동안 있었는 일을 얘기라도 하는 듯 쉴 새 없이 입을 오물거렸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잠들면서 아이를 꼭 안을 수 있던 주말 동안의 짧은 시간. 늘 그 시간이 빨리 가지 않기를 바랐다. 일요일이 되면 다시 서울에 올라갈 생각에 늘 마음이 무거웠고, 일요일 저녁 집에서 나와 서울행 기차에 올라탈 때는눈물을 삼켰다.
서울 집에 도착하면 여지없이 참았던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어떤 날은 영상통화를 하기도 했다. 화면 속의 아이는 잘 놀고, 잘 웃고 있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면, 어김없이 외로움이 나 홀로 있는 외딴섬에 썰물처럼 밀려왔다.
입시가 치러져 늦게 퇴근하고 오는 날에는 집에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런 날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사무쳤다. 오늘은 별일 없이 잘 보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나를 찾진 않았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입시가 절정에 달하는 시기가 오자, 주말에도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2주에 한번 , 어떨 때는 3주에 한번, 어떨 때는 한 달에 한번.
그 사이 아이는 쑥쑥 자랐다. 언니와 엄마가 동영상을 촬영해 보내주기도 했고, 영상통화를 하면서 아이와 눈을 마주쳤지만, 직접 만질 수 없는 아이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나는 결혼도 했고,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데, 왜 우리는 모두 각자 따로 이렇게 이산가족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이게 맞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모두에게 최선이야...
내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 이럴 수밖에 없음을 정당화시켜 보지만, 아이에 대한 그리움만은 어느 것으로도 충족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아이를 직접 양육하지 못하는 엄마의 미안함이 컸다.
"애착형성에 생후 2년은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
육아서나 육아 관련 방송에서 엄마와 아이의 애착에 관한 내용을 보면, 생후 2년을 가장 중요한 시기로 보고, 그래서 가능하면 엄마가 그때까지는 직접 돌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아이를 언제까지 광주에 둘 수 있을까? 돌 지나 더 떨어져 지내면 나도 아이도 점점 멀어지는 건 아닐까, 아이가 나보다 할머니와 이모에게 더 애착을 가지게 되지는 않을까.
결국 엄마인 내가 키워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아이를 데려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엄마로서 직접 아이를 키워야겠다고 매일매일 다짐하며, 아이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보러 다녔다.
사회생활하며 모아놓은 돈의 일부는 호주 어학연수 가면서 상당 부분 사용했고, 나머지 돈이 원룸 보증금이었다. 가진 돈이 많지 않으니 구할 수 있는 집의 범위가 넓지 않았다. 유모차를 가지고 다닐 수 있어야 했고, 주차장도 있어야 하고, 모녀 둘이 있는 시간이 많으니 경비실이 있는 단지였으면 했다.
그렇게 구한 곳이 내 나이만큼이나 오래된 큰 빌라단지였다.
오래된 집은 나이만큼이나 손볼 곳도, 사건(?)도 많은 집이었다. 도배, 장판은 다시 했고, 오래된 창틀과 문의 색이 너무 어둡고 칙칙해서 몇 날 며칠을 손수 페인트칠을 했다.
추운 겨울날 보일러가 고장 나, 이틀 동안이나 냉골에서 지내야 했다. 주인한테 얘기해 새로운 보일러를 설치했다. 그리고 또 얼마 후 윗집 주방에서 물이 새서 새로 한 벽지가 망가지고 말았다. 윗집에서 도배를 다시 해주었다. 이 모든 게 다행히 아이를 데리고 오기 전이라 감사했다.
아이의 돌이 다가온다. 이는 곧 아이를 데려올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돌잔치 준비에 돌입했다. 작게 준비하려던 돌잔치는 가족친지분들 초대인원을 세어보니 규모가 점점 커졌다.
아이 성장동영상과 아이 사진을 이용한 사랑 해 책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영상제작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만드는 방법을 찾아가며 틈틈이 만들어갔다. 아이와 떨어져 있어서 좋은 점은 이런 작업을 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점이었다. (둘째 때는 언감생심,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