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쭈욱~
자유로운 영혼으로 매 순간을 넉넉하게
끝 가는 데를 몰라도 되는 영혼은 자유로울 거다. 마르지 않는 샘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우고 비울 수 있으니, 늘 풍요롭고 넉넉할 거다. 세상 살면서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또 마르지 않는 샘처럼, 빈 마음으로 넉넉하게 한없이 주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난 지금 그 진수를 살짝 맛보는 거 같다. 나 스스로가 무척이나 넉넉하고 자유롭게 여겨진다. 지금 당장은 세상의 그 무엇도 나를 옥죄거나 누르지 않아서일까? 마치 산속의 옹달샘처럼 누구와든 뭐든 나눌 수 있을 거 같은 홀가분하고 기꺼운 마음이다. 그래서일까? 몸은 깃털처럼 가볍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포장해야 되는 판매 물품에, 박스에 넣어야 되는 택배 물량에 압도되어 있었다. 아무리 해도 줄어들지 않는 일 량에 지쳐 있었다. 인건비를 아무리 많이 지급한다 해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주변에서 찾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영국물류 사장님께 보내야 되는 운송비에, 한국 관세 대행업체에게 지불해야 되는 통관비에, 영국 옥션회사에 보내야 되는 구매대금에, 택배 과정에서 깨진 물건들 환불해 줘야 되는 문제로 그야말로 온몸을 옥죄는 압박감에 하루하루 숨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건 영국에서 판매한 물건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건지에 대한 불확실한 상황과 구매자들의 독촉이었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폭발 직전이었다.
근데 수요일 저녁, 영국 물건이 인천 공항에 도착했고, 토요일 아침인 지금 우여곡절 끝에 괴산 집 마당에 와있다. 구매대금과 통관비도 할부로 돌려서 대충 해결했고 영국 물류비와 인건비 결제도 시간을 좀 벌었다. 제자에게 갚아야 되는 돈도 조금 연기시킬 수 있어서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다.
갑자기 압박감이 사라져서일까? 몸이 가벼우니 일에 대한 압도감이 줄어든다. 그래서일까? 패킹도 박싱도 해 볼만한 일로 다가온다. 난제들이 하나씩 풀리고 있다.
이건 내게 기적이다. 거울 속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환하게 반짝거린다. 내 눈에는 아름답게 보인다. 온몸에 스멀스멀 일어나는 센세이션, 가볍게 달뜨고 몽글몽글 퍼지는 이 신체 반응은 행복감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을 뜻하는 화양연화. 나는 감히 내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선언한다.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이, 내 일상이 화양연화라고.
바꾼다. 내 기대와 바람을. 연재 첫머리에 썼던 3년 뒤의 화양연화를 지금 여기의 내 일상 속에 끌어당겨 놓는다. 난 내가 지금 가장 아름답게 여겨지고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정서 상태는 행복해서 얻어진 게 분명하니까. 바보 거나 미치지 않고서야 이 멋진 상태를 왜 불확실한 미래로 밀쳐 놓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쭈욱 회양연화로 지속되는 삶이길 염원한다. 아니 믿는다.
동생의 암 오진의 아찔한 소동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지금 여기에서 매 순간 살아있음의 가치와 의미를 한층 더 절절하게 깨우치게 했다. 브런치 북 연재 6회 차인 지금 이 글쓰기의 제목과 내용은 첫 회 것을 전면 부정하는 컨셉이다. 첫 회로 돌아가 수정 작업을 해야 될까? 아니다. 그 또한 그대로 진실이었다. 그때는 그랬으니까.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우리 삶은 그렇다. 우리는 매 순간 자기가 가진 자원만큼으로 그 순간을 산다. 지적, 정서적, 신체적 자원 말이다.
세월이 흘러도, 나이가 들어도, 날카로운 분별력으로, 풍부한 감성으로, 강인한 체력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만끽하는 게 삶을 대하는 최고의 자세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내가 여기에서의 내 일상을 화양연화라고 하는 건 논리적으로도 너무 타당하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내가 그걸 온전히 느끼고 있다는 거다. 온몸과 마음으로 가멸차게 재확인하고 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