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단밤은 식구들이 즐겨 먹는 겨울 간식입니다. 길가에서 가끔 만나는 것은 양도 적고 비싸 늘 서로 아쉬워하죠. 아내 덕분에 이제는 약단밤도 집에서 구워 먹습니다. 가끔 배달시키는 곳에서는 자잘하지만 단단하고 단 밤들이 몰려옵니다. 한 알 한 알 칼집이 다 나 있는 상태로요. 남들 덕분에 편안하게 잘 먹고산다는 것을 약단밤 한 알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약단밤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밤을 길거리에서 파는 것도 어른이 되고 난 후에야 본 장면이긴 합니다. 아기 주먹만 한 굵은 산 밤을 그냥 산에 올라가 장대로 후드득후드득 털면 되는 것이었죠. 한꺼번에 익혀야 하기 때문에 엄마는 쓱 씻어서 소쿠리에 그득하게 삶아내었습니다. 하지만 군밤보다 단내도 결했고, 껍질에 칼집을 내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삶아지기 전에 몇 주먹만큼 덜어내 나중에 천천히 연탄불위에 마당 한편에 늘 있었던 자그마한 석쇠를 올려 구워 먹었습니다. 구운 밤은 삶은 밤보다 더 달콤해요. 밥을 먹다 중간중간에 먹는 간식처럼 아껴 먹게 되는 건 마음까지 달콤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물론 마음이 급해 껍질에 숨구멍도 내지 않은 채 굽다가 폭탄 터지는 소리에 엄마 고함 소리가 여러 번 올라타기도 했지요.
이제는 왼손 엄지와 검지가 저릿해지는 칼질 가만히 앉아 그냥 만끽하면 됩니다. 에어프라이기 안에서 서서히 밤이 익어가는 뜨끈한 단맛의 입자들이 코끝에서 부서지며 나의 감각을. 1분, 1분 지나면서 마치 처마 밑 툇마루에 걸터앉아 실눈을 살짝 감고 빗방울이 댓돌 위에 총총총 떨어지는 소리를 나른한 눈으로 듣는 듯 몽롱해하면서 말입니다.
하북성 천서 어느 숲 속에서 새벽이슬 맞으며 영근 약단밤.
케냐 엘곤 산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산비탈에서 사자의 발소리를 듣고 자랐을 커피콩.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내려와 빌딩 숲 사이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살고 있는 나.
커피 한 모금을 입 안 가득 머금고 나니 약단밤의 단내가 커피 향과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만나 춤을 춥니다. 약단밤과 커피콩 덕분에 무한한 자유를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러면서 우리 셋의 만남은 '껍질'의 조우구나 싶어 집니다. 껍질은 궁극적으로 희생입니다. 다른 생명을 만날 때까지, 자유를 만끽할 때까지, 궁극적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보호막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코끝에서 부서지는 약단밤의 달달한 향은 호쾌하게 어깨를 딱 벌린 듯한 껍질의 칼집 사이에서 뜨끈하게 솟구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향은 여름을 가득 담은 외피와 내피 사이, 내피와 밤 살 사이, 밤 살과 자연의 대지 사이를 가득 채웠던 우주의 거대한 기운이 압축된 것일 겁니다. 그 기운을 챙겨 안고 있는 게 껍질입니다.
하지만 모든 껍질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 껍질에 쌓여, 껍질에 가려, 껍질에 막혀 있던 그 안에의 정체성이 이루어지는 동안 비바람으로부터, 추위와 더위로부터,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기 상실을 막아주는 방어막 역할을 묵묵히 하다가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건 껍질이 덮여 있다는 것은 그 안에 가능성의 생명력을 가두어 두고 있는 것이니까요.
커피 한 모금을 넘기려는 순간, 칼집이 제대로 나지 못한 약단밤 한두 알이 '펑', '펑' 터집니다. 그 소리와 함께 에어프라이기 안에서 도는 밤을 따라 나도 같이 돌고 돕니다. 어디에서 얼마나, 어떻게 돌아야 나도 달달한 향이 더 날까 생각을 해 봅니다. 내 안에 응축된 것들이 볼썽사납게 터지지 않게, 조금씩 새어 나올 수 있게 칼집이 필요하구나 싶어 집니다.
지금껏 껍질에 껍질을 만드느라 시간과 비용을 많이도 써 왔군요. 별 것 없는 것들을 싸매고, 가리고, 숨기느라 말이지요. 어쩌면 어느 날 어느 한순간. 한 알 한 알 응축되기 시작했던 '가능성'이 겹겹이 둘러싼 껍질 때문에 이미 쭉정이가 되어 버린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껍질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껍질은 이중성을 띱니다. 속을 키워낼 때는 최대한 두껍고 질겨야 하지만 속을 내보일 때는 껍질을 벗겨져야 합니다. 연탄불 석쇠 위에서, 에어프라이기 안에서 밤은 껍질덕에 제 살을 스스로 잘 타오르게 만들어 줍니다. 익을 대로 익으면 '탁'하고 알아서 벌려집니다.
단단한 가능성을 달달하게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도 옆에 있는 다른 밤에게는 절대 의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옆에 있는 약단밤에 붙은 불씨를 꺼트리지도 않습니다. 그런 밤을 내려다보면서 다시 내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태우려 하는가.
나는 무엇에 나를 태우려 하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불타고 있는가.
나는 무엇으로 스스로 불타는가.
나는 누구를 위해 스스로 불타는가.
나는 나를 잃지 않고 스스로 잘 불타는가.
나는 타기 전에 스스로 나를 잘 벗겨내는가.
밤 알 한 알 한 알을 감사한 마음으로, 커피콩 우린 물 한 모금 한 모금을 기쁜 마음으로 삼키면서 '대자연'이 낳아 준 생명들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끝까지 해내려면 스스로 타오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타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좋아하는 동시에, 자신이 왜 그 일을 하는지 명백한 목표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_<왜 일하는가>(이나모리 가즈오,2021,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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