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놀줄 아는 사람 ] 은 ‘삶=놀이’라는 사유의 탐험이다. 일과 삶, 삶과 놀이, 놀이와 내가 분리된 상태를 들여다 보고 제대로 놀줄 아는 삶의 방향을 찾는 여정이다. 일상을 지키면서 재미와 의미가 넘치는 시간 속으로. 가짜 나로 인정받는 것보다 진짜 나로 미움받는 게 더 이득인 삶의 실천을 위하여!
새벽에 일어나 소리 죽여 발코니로 건너가면 조금뒤 어김없이 저의 새벽을 반겨주는 새하얀 그림자가 다가옵니다. 발코니에서 거실로 향하는 불투명 창너머로요.
바로 십 년을 같이 살고 있는 반려견 코코입니다. 가족들은 그렇게 부르지만 글 속에서 저는 코코를 '타닥이'라고 부릅니다. 반갑고 미안한 두 마음 때문에요.
새벽에 저를 향해 달려오면서 거실 마루를 구르는 소리가 그렇게 들립니다. '타 다다다다~~~ 악'. 좀 더 귀를 가져다 되면 아마 끼~이~~ 악하고 들릴지도 모르겠어요. 곤한 잠에서 방금 깼을 텐데 온몸으로 신나게 달려오거든요. 저를 만나겠다고. 저를 봐주겠다고 말이죠. 너무 반갑죠.
미안한 마음은 이래요. 한참을 같이 지내다 알았거든요. 제가 '타닥이'라고 부르게 된 그 소리가 마루 바닥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잰걸음을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고관절 수술을 하면서 알게 되었거든요. 몰티즈 견종이 원래 관절이 좋지 않게 타고난다는데, 거기에 마룻바닥이, 우리 집이, 우리가 가속도를 붙인 것이었죠. 우리 가족의 행복한 순간이 타닥이에게는 고통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이 들어 미안합니다.
그런 코코를 반려인을 마땅찮게 생각하시던 엄마, 아버지도 아주 좋아하시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코코가 먼저 엄마, 아버지를 좋아하기 시작했거든요. 언제 봐도 처음 봤을 때처럼 영혼까지 흔들어 되듯 반깁니다. 특히, 엄마보다 아버지 허벅지에 엉덩이를 바짝 갖다 붙이고 가만히 올려다볼 때면 아버지 표정이 다른 분 같아지곤 해요.
그때 아버지를 통해 배어 나오는 미소가 인간이 원래 지니고 있었을 본성의 미소가 아닐까 싶어지기도 하거든요. '눈빛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사람이지'라고 자주 말하시는 것만 봐도요. 그렇게 가만히 코코와 아버지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반려견 '아트만 Atman'과 함께 살았던 쇼펜하우어의 말이 떠오릅니다.
'인생 첫 강아지를 분양받았다'라고 주변에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축하를 해 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려 동물이 생겼다는 건 책임질 가족이 생겼다는 것과 같으며 그 개를 떠나보냈을 때 몹시 슬퍼할 가능성'이 새롭게 생겼으니, 앞으로 모쪼록 그 개를 잘 교육하고 보살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자의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되, 후자의 말 역시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나의 행복을 위해 '조심하고 신경 써야 할 의무'가 하나 더 생긴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주1)
주1>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인생수업;한번뿐인 삶 이렇게 살아라, 2024, 하이스트
'조심하고 신경 써야 할 의무'. 네, 맞아요. 무언가를 가지면 가질수록 자유는 줄어듭니다. 그 무언가를 위해 내 자유를 (기꺼이) 내어 주어야 하는 순간들이 늘어나니까요. 특히, '식구'는 더 그렇죠. 무의식의 영역에서 '내어주리라' 다짐하고 맞이한 거니까요. 같은 공간에서 같이 먹고 자면서 같이 생활을 하는 관계.
하하. 방금 그 새하얀 그림자가 발코니로 통하는 창문에 앞다리 기대 올리며 나타났습니다. 오늘은 조금 늦었네요. 코코가 늦잠을 잤다 봅니다. 어제 야근을 마치고 좀 늦게 돌아왔지만 일부러 산책을 한참 하고 재웠거든요. 요즘 코코가 먹성 터져서 움직여야 하거든요.
저와 코코처럼 쇼펜하우어의 아트만도 분명 이랬을 겁니다. 방금 같이 있다 잠깐 나갔다 와도 처음 본 것처럼, 하루 종일 안타깝게 헤어졌다 만난 듯 온몸에 가득 담긴 맑은 영혼으로 반겨줍니다. 안 좋은 다리로도 껑충껑충 뛰고, 이리저리 세리모니 하듯 달리면서 우주의 기쁨을 표현해요.
사정없이 흔들리는 꼬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제가 날아가 버릴 듯합니다.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죠. 세상 누가 나를 매번 그렇게나 반겨주나 싶어지는 순간, 순간들의 연속이지요. 분명 아트만도 쇼펜하우어를 이렇게 대했을 겁니다. 외로웠던 쇼펜하우어가 아트만과의 교감 덕분에 삶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와 아트만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네요. 쇼펜하우어 사상의 핵심은 '의지'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고 봤죠.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과 그로 인한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으로 말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아트만의 단순하고 순수한 삶의 방식에서 인간이 복잡한 욕망에서 벗어나 현재에 집중하고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내내 강조합니다. 아트만을 단순한 동물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비추는 거울로, 삶의 고통과 욕망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묘사하면서 말이죠.
아트만과의 교감을 통해 깊은 유대감과 위안을 얻은 것입니다. '의지'는 쇼펜하우어에게 고통의 근원이었으니까요. 아트만을 코코에게 가만히 빗대어 봅니다. 그 모습에서 '놀이', '논다는 것'의 철학적 의미가 조금씩 들리는 듯합니다.
'놀이'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저에게만 낯선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철학계에서도 본격적으로 다루거나, 몰두한 철학자들이 잘 보이질 않는 것을 보면요. 하지만 그렇게 찾아 헤매다 낯익은 이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바로 니체와 쇼펜하우어였죠.
너무 반가웠습니다. 아니, 지금도 저만의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는 중이죠. 그래서 지금 새벽마다 '놀이'에 대한 그들의 생각들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조금씩 저의 이야기로 다가오면 '놀이'에 대한 탐험을 조금 더 깊게 신나게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면서요.
아, 코코가 아홉 살이 되면서 뚜렷하게 달라진 점이 하나 있습니다. 산책을 할 때요. 산책은 주로 저와 함께 하는 편인데, 보통 집 주위로 걷는 길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잖아요. 조금 짧게 도는 길이 있고, 한참 걷는 길도 있고요.
그런데요. 어느 날부터인가 자기가 걷고 싶은 길을 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먼저 목줄을 잡고 나가면 버티기 시작한 것이죠. 물론 성격상 과격하게 버티지는 않습니다. 못 이기는 척 따라오긴 옵니다. 그런데 느낌이 달라요. 걷는 속도도 달라요.
그래서 역시 어느 날부터 물어봤습니다. '아, 저쪽으로 가고 싶은 거라고?'. 하면서 당겨진 목줄에 힘을 빼면 곧장 되돌아 다시 걸어온 길을 지나갑니다. 뒤따라가면서 보면 새벽에 밥 줄 때 엉덩이처럼 실룩거리면서요. 지구의 모든 냄새를 맡으려는 듯 모든 근육이 요동치게 노즈워킹을 하면서요.
뒤따라가면서 가만히 생각을 하게 됩니다. 코코가 본능적으로 원하고 있는 저 것들이 모두 '놀이'가 아닐까 하고요. 자기 신체 기능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영혼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스스로 찾은 길을 걸으면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시도해 본 후,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경험을 만끽하는 것.
지난번 (click 다시 읽기) 남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놀이'에 대한 저의 정의를 이렇게 제안했었습니다. 이 내용이 어떻게 수정되어 '놀이'에 대한 정의가 전개될 수 있을 지 기대됩니다. '제대로' 잘 노는 인생을 지금부터라도 천천히 만들어 봐야 할 것 같거든요.
'강요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어느 정도의 고통이 수반될 수 있는 재미있고 즐거운 모든 신체적, 심리적 활동'
https://blog.naver.com/ji_dam_